태양은 가득히 Part 1. Immature 나는 한 여름의 작열하는 태양을 볼 때면 언젠가는 저 뜨거운 불덩이가 나를 포함한 지구 전체를 덮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내가 살아온 19년 동안 지구는 약간의 온도상승만이 있었을 뿐 우려하는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다.(그 온도상승이라는 것이 100년 동안 0.5도였기에 다행이지 조물주의 농간으로 그 수치가 1년이 되어버렸다면 나는 아마 가마솥에서 추어탕이 되길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미꾸라지의 심정이었으리라) 온도상승을 혹자는 '지구온난화'라 일컬었는데 이것은 인간들의 이기심이 만들어낸 '자업자득'의 사자성어를 몸소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대표적인 역환경단어(?)라고 할 수 있겠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동화되고 싶은 네츄럴(natural)한 사고방식을 가진 나로서는 저 단어가 떠오를 때 마다 길을 가다가도 고개 숙여 '묵념'하고픈 심정이 들고 예수그리스도나 부처님을 볼 때 마다 왠지 '죄인'이 되버리는 느낌이란 말이다.(참고로 나는 무교다) 인간들의 무책임한 활동(화석연료의 소모)으로 지구는 점점 온실이 되어가고 내 마음은 사막처럼 바싹바싹 타 들어가 삭막해지고 있었다. 점점 시들어가는 내 정신과 육체는 상관없다는 듯 뜨거움을 쏘아대는 태양을 원망했지만...나는 결코 외면할 수는 없었다. 나의 태양은 밤이 되어서도 결코 그 열기를 거두어 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지구온난화'에 기여한 불특정다수를 향해 욕설을 퍼붓는 한심한 짓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19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가 되는 일은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해 15년 동안 핏덩이를 홀로 키워 오신 아버지께서 포장마차 일을 하시다가 지병인 심장병으로 운명을 달리하셨을 때 옆에서 당신의 눈을 감겨드리지 못한 것과 그로 인해 방황하던 시절 태양에 눈을 멀어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자상한 분이셨다. 말로 표현하시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가끔 무뚝뚝하게 내뱉으시는 말씀은 나를 무지하게 감동시키곤 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표현하시는 솔직한 분이셨기 때문에 누군가 나에게 '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아버지'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은 한줌의 재가되어 자연에 묻히셨지만 아직까지 내 마음속에는 그분이 살아계시고 나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신다고 믿고 있다. 이만큼 든든한 배경(?)이 있는데 두려울 게 무엇이 있으며 세상에 꿀릴 것이 무엇이 있을까. 비록 내가 타인의 시선에는 부모 없이 막 자란 것도 모자라 정을 주는 상대가 남자라는 꼴불견일지 몰라도 마음속에 살아계신 아버지가 나를 이해해주신다면 그런 시선들 쯤이야 백이면 백번 모두 다이나믹한 미소로 무시해줄 수 있다. 살아생전 아버지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항상 강조하셨던 말씀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였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평가했을 때 나의 외모가 남들보다 특출(?)나다는 자부심 때문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준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하해와 같은 깊은 뜻을 상감마마와 같은 아량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기위해 나는 아버지의 어록을 실천에 옮기려 많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아직 우매한 백성들이 내 깊은 속내를 어찌 다 헤아리길 바라겠으며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의 운명을 어디서 탓하리오. 그래서 나는 주어진 삶을 상큼한 미소로 답하여 받아들이고 '온몸의 광합성화'라는 미래의 계획을 목표 삼아 그것을 실천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무려 4년동안 뒷바라지(?)해온 최태양이란 녀석은(복이 아주 넝쿨째 굴러들어온거다) 이름 값을 톡톡히 하는 My Lover이다. 이렇게 말을 하면 내가 무슨 그 녀석의 애인 이나 여자친구 씩.이.나 되는 줄 알테지만 현실은 그다지 호락호락 하지도 그렇다고 로맨스하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쿨~한척 했지만 속으로는 위태위태하게 잡고 있는 외줄을 혹시라도 끊어버릴 까봐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내유외강의 모습이 지금의 나이다. 그렇다고 무슨 짝사랑에 목매어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그런 초라한 나의 모습을 떠올린다면 뱁새가 황새 쫓아갔다는 말보다 더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란 걸 밝혀두는 바이다. 일전에도 말했듯이 나는 출중한(?)외모와 착한 심성으로 어딜 가도 대접받는 그런 멋진 싸나이란 말이다. 비록 지금은 나의 진가를 몰라보는 내공의 정도가 많이많이 부족한 태양이 녀석 때문에 고생을 조금 하고 있지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 말이 괜히 생겨났겠나.. 결국 태양의 서광은 내 마음의 구멍을 따뜻하게 채워주리라 굳게 믿고있다. 태양이 녀석을 처음 만난 날은 지독하게도 흐린 날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한동안 정신적으로 패닉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나는 예전의 모범적인 생활패턴에서 불량버전으로 전환하며 길거리를 방황하는 모든 이들에게 타의 모범이 되기위해 '변신 불량배'가 되었다. 밤거리를 배회하며 어둠의 아이들과 어울렸던 것은 단순히 세상에 대한 불만이나 불우한 가정환경 탓이라기보다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그 어떤 것도 당신의 빈자리를 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떠다니는 조각배의 하나밖에 없는 돛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예전과 같이 먹고 예전과 같이 자고 예전과 같이 생활한다는 건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의 '변신 불량배' 생활은 그 아픔이 조금 만이라도 사라질 때까지를 유예기간으로 정하고 시작되었는데 예상외로 자유분방한 그 분위기나 행동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같이 어울린 불량배 다수들과도 어떤 면에선 마음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거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레이트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세상을 일찍 배워 정신발육이 빨랐던 형님스러운 나를 제대로 알아보고는 곧 내가 그 무리들과 섞여 '함께 방황하며 밤을 불태워보세'를 실천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배려해주었다. 인생이 꼬일라치는데 박복하기까지 하면 그대로 접시물에 코 박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으리라.(역시 여린 심성은 어쩔 수 없는 거다) 고맙다! 동지들이여!! 라는 외침도 무색하게 그것을 인복이라 여겨 조금만 꼬여도 되었을 인생 완전 뒤엉켜 복귀절대 불가능한 실타래처럼 얽키고 섥켰으니 이내 몸 어찌하리.. 아무튼 그날은 나에게 삶의 희로애락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줄 아주 멋지고 징글맞은 녀석을 만나게 해준 눈물나게 고마운 금요일이었다. 그 당시 내가 어울렸던 패거리들은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모여 중학생의 신분에 맞지 않는 이런 짓, 저런 짓(??)들을 즐겨했는데 그 중 하나가 음주가무였다.(더 이상은 상상하지 말라) 중학생이 무슨 돈이 있겠으며 나를 비롯한 패거리 녀석들은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이 아무리 많아도 일당 만원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나마 있는 돈을 박박 긁어모아 술, 약간의 안주(새우깡이나 고래밥, 깡소주라 불리우는 것)를 사서 아지트라 정해놓은 공원에 둘러앉아 그것들을 홀짝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뒤의 가무는 나이트의 현란한 조명아래에서 가무가 아니라 고작 카세트 테잎을 돌려가며 유행하는 춤을 찬바람 맞으며 즐기던 가무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술기운이 약간씩 올라오고 우리의 춤꾼 원영이의 재롱떠는 모습을 보며 즐거워하던 찰나.. 갑자기 공원 입구쪽에서 약간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왠지 걸어오는 폼들하며 덩치로 봐서 동네 건달쯤이라고 생각했는데 좀 더 가까이 오자 입고 있는 옷이 교복이라는 걸 알았다. 생긴 것과 다르게 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는 형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저 표정들로 보아하니 그럴 가망성은 전~혀 없어보였다. 중학생들이 공원에 앉아서 음주가무를 즐긴다는건 거슬린다는 이유만으로 시비거리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역시 우리가 목적이었던 듯 '나 불량배다'라는 기운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껄렁껄렁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영원아. 어떻게할까?" "...있어봐" 음악을 끄고 옆에 앉아있던 수현이 물었다. 우리 애들은 깡은 있는데 결단력이 좀 부족한게 흠이다. 무리에 합류하고 나서 곤란한 일이 있으면 항상 내가 결정을 내리곤 했기 때문에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갈 것이지 귀찮게 하네.. "오밤중에 왠 춤사위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밖에 처돌아다니면 변태 아저씨들한테 잡아 먹힌다.“ 남 말하고 있네. 얼굴에 개기름이 좔좔 흐르는게 딱 변태 아저씨구만. 저렇게 비꼬면서 대사 길게하는 것들은 백이면 백 머리수로 밀어 붙이는 모자란 것들이다. 저쪽은 다섯 우린 넷. 쪽수로보나 덩치로보나 모두 불리한 상황이다. "재수없어." 원영아.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고 내가 몇번을 말했니. 얼굴은 이쁘장한게 우리 중 가장 입이 험하다. "뭐? 재수가 없어? 요 애새끼 봐라..니들 들었냐?" 그렇게 크게 말했는데 못들은 사람이 여기 있겠니? 그건 그렇고 지금 저 형들의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 보이는데.. "야! 너 일루와봐." "필요하면 니가 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저 입심은 아무도 당할 수 도 없을뿐더러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김원영. 나중에 보자. 기가막힌 표정으로 잠시 벙쩌있던 불량배 형들이 곧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원영이 너 뒤로 가 있어" 내 말에 즉각 뒤로 숨는다. 말에 책임도 못질거면서 입만 살아서는. 그게 니 매력이긴 하다만 주위사람이 상당히 괴롭단다. 내가 좀 눈치를 주자 곧 입을 삐죽대며 눈을 내리깐다. "저 쥐새끼 숨는 것 봐라. 어짜피 다 고만고만 한 것들이. 야! 니가 대신 맞을래?" 저 손가락은 필시 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늘 편안하게 두다리 뻗고 자기는 글렀구나. "형들. 제 친구가 입이 좀 걸어서 그래요~ 단속 시킬께요. 그냥 애교로 봐주세요" 싱긋 웃으면서 말하자 동시에 표정들이 싹 굳는다. 솔직히 저 표정 감상하려고 꺼낸 말 맞다. 볼만하구나. "이것들이 다 겁을 상실한 것 같구만. 니 어디를 봐서 귀엽게 애교로 봐줄까?" 리더격인 듯한 녀석이 나오더니 내 앞에 서서 비꼬듯이 말했다. 허울 좋고 폼도 좋고 표정도 좋긴한데.. 왜 이런데다 써먹는거니. “소주까고 달밤에 체조하는건 좋은데 할려면 눈에 안띄게 해야지. 여기는 공공장소라는 곳이다. 초등학교 안나왔어?” “졸업한지가 오래되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요. 요즘 초등학생들은 공원 단속하는 법이라도 배우나 보죠? 그럼 공공장소를 공공으로 쓰지 않고 독점하려는 형들은 바로 구속감 아닌가요?” 이곳은 우리 멤버가 모이고 나서부터 함께해온 정든 아지트였다. 나는 정이 많아서 한번 집착을 보인것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너 여기에 말 한번 잘못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많다는 말 못 들어봤냐?” “글쎄요. 괜히 선량한 시민한테 시비걸다 창살달린 창문이 있는 방에서 외롭게 여생을 보낸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 봤습니다만..” 드디어 화가 폭팔했는지 왼쪽 주먹을 복부쪽으로 뻗어온다. 주먹은 강해보였지만 스피드는 약해 옆으로 몸을 틀며 한번 웃어줬다. 싸움에서 상대방의 집중력을 흐리고 흥분시키면 상황이 내 쪽으로 유리하게 흐르는 것은 당연지사. 어! 그런데 느리다고 생각했던 오른손이 빗나가자 상당히 빠른 왼쪽주먹이 허리를 파고들었다. 왼손잡이군. 트릭도 쓰나? 한대 맞는다 싶었는데 갑자기 그 주먹을 막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우리 애들 중에 이렇게 큰 손을 가진 사람은 없는데.. 그리고 뒤쪽에 느껴지는 커다란 무게감이 그 짐작을 확신케했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나는....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자세히 본 일은 없지만 흔히 완벽한 조각이라 불리우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을 떠올리게 하는 옆모습과 또래임을 연상하게하는 얼굴과는 달리 온몸에서 내뿜는 그 중압감이란.. 살짝 어깨가 닿았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몸의 떨림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귀를 살짝 덮고 있는 약간 붉은 빛의 머리카락이 기분 좋게 흩날리면서 미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고 적장 ‘골리앗’을 노려보는 듯한 매서운 눈빛은 상대방을 그것만으로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이다. “도와줘?” 도저히 말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그의 외모에 속으로 수십번을 감탄하고 있는데 이건 또 왠일인가. 목소리 또한 예술이었다. “아악!!” 단발의 외침과 함께 나를 향해 주먹을 뻗었던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우둑’하는 뼈 소리와 함께 뒤로 나뒹구는 녀석은 상당히 충격이 컸던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나갔다. 한눈에 봐도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정확히 상대방을 굴복시킬 수 있는 싸움꾼은 흔치 않다. “도와줄까라고 물었어” 내가 가만히 있자 다시 한 번 대답을 요구했는데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아마 기다리는걸 싫어하거나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일거다. 두 번째 물음에 대답이 없자 미련 없이 돌아서버렸으니까. “저..저기”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아무튼 그를 그냥 보내면 반드시 후회할 것 같았다. 내가 부르는 소리에 멈칫한 뒷모습에 대고 말을 이었다. “도와주세요” 나름대로 그를 멈추게 할 가장 적합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질문에 대답이 되었고 다시 뒤 돌아서 주었으니까. “이..이 개새끼들..” 어디서 욕지거리가... 아! 잠시 잊고 있었군. 엑스트라급 불량배들이 독이 오를대로 오른 표정으로 한꺼번에 덤비기 시작해서 미처 방어할 타이밍을 못마춘 나는 한대 맞을 각오를 하고 같이 주먹을 뻗었다. 이래뵈도 1:1싸움에선 왠만하면 밀리지 않는 싸움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더 빠른건 내 오른쪽 옆에있던 태진이었다. 내가 항상 오른팔이라고 든든해하니까 꼭 오른쪽 편에 서길 좋아하는 귀여운 녀석이다. 태진이도 파워는 약하지만 스피드는 상당해서 저 주먹에 연타를 맞으면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데미지를 입기 마련이다. “nice! 태진” 혼자라면 재미없겠지만 녀석들이 있으므로 신이난다. 싸움도 즐기면서 해야 맞아도 덜 아픈 법이다. “조심해. 영원” 애정(?)의 눈빛을 서로 주고받은 뒤 앞에서 덤벼오는 놈들에게 다시 집중했다. 나는 싸움을 할 때 최대한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상대방의 허점을 노리는데 이게 말이 쉽지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다. 지금처럼 말이다. 싸움엔 젬병이고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원영이나, 삼십육계만을 특기로 가지고 있는 수현이를 제외하면 태진이와 내가 앞에서 해결사 노릇을 하지만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는 네 명 모두 수현의 특기를 따라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는 편이다. 이봐 다비드! 도와준다면서~ 벌써 서너대는 맞은 것 같은데 이러다 내 잘생긴 얼굴에 흠집이라도 나면!! 아슬아슬하게 발길질을 피하긴 했는데 역시 무리다. 제발 대가리수로 밀어붙이지 말란말이다. 니들은 남자로서 자존심도 없냐? 다리가 꺽이고 무릎에 땅에 닿자마자 몸을 웅크리고 충격을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물론 얼굴부터 보호하며 말이다. “헉! 히끅” “으..아아.악!” “컥! 끄악” 갑자기 린치의 고통이 몸을 떠나는가 싶더니 내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괴상한 비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여러명이 한꺼번에.. 태진의 작품일리는 없고(따지고봐도 태진이보다는 내가 조금 잘한다. 싸움을)다비드가 도와준다고해도 혼자서 다수의 비명소리를 자아내기엔 무리가 있을텐데. 곧바로 시선을 준 곳에는 말 그대로 영화의 한 장면이 재현되고 있었다. 다비드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이 세명 더. 상황은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도대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지존들이오! “젠장. 피가 끈적거려” 비너스 지존이 상당히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며 손에 묻은 피를 혀에 가져다 댔다. 언 듯 봐선 그것을 먹는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비위가 상해버렸다. “준아. 피 먹지마” 약간 허스키 보이스의 다른 지존이 비너스 지존의 손을 잡고 자신의 옷에 피를 닦았다. 내가 불쾌한 얼굴의 지존을 비너스라 부른 이유는 물론 저 찬란한 외모 때문이다. 아무래도 나는 지금 소설이나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따근따끈한 주인공들을 보고있는게 아닌가 싶다. 보통사람들 보다 특출난 미모(?)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원영이는 저 비너스에 비하면 평범하게 봐주는것도 고마울 정도다. 그리고 나머지 두명은 어떤가. 나의(?) 다비드는 말할 것도 없고 더 이상의 예술 지식이 부족한 관계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두명 모두 잘 깍아 만든 조각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렸다. 허스키 보이스가 이쪽을 슬쩍 쳐다보자 내 몸을 일으키던 원영이의 몸이 굳어지고 얼굴이 잘 익은 사과가 되어간다. 도도한 우리 원영이가 눈빛 하나로 가는구나.. “일단 얼떨결에 끼어들어 피까지 보긴 했는데..” 저 손수건은 금가루라도 뿌린거냐. 조명아래 번쩍번쩍 하는구만. 얼굴에 튀어버린 피를 닦으면서 허스키 지존이 말했다.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군. 저기에 니 발목을 잡을만큼 매력있는 인물은 없는 것 같은데..” 이봐이봐. 그렇게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라구. 매력이라면 넘쳐서 주체할 수 없는 인간이 여기 있다니깐.. “설마 저 오렌지색 머리한테 관심있는건 아니지?” “쿡.. 차라리 내가 낫지 않아?” 원영이를 지목한 것 같긴한데.. 비너스. 니 말이 맞긴 하다만 왠지 엉덩이를 한대 걷어차고 싶구나. “전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던 다비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역시 목소리 죽이는군. 보아하니 같은 중학생 같은데 넌 변성기라는 것도 없니? 내 모양새가 제일 안좋은걸로 봐서 우리 애들은 모두 괜찮은 것 같았다. 다만 녀석들도 혜성처럼 나타난 저 무리들에 의해 돌처럼 굳은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을 빼면 말이다. 고맙다고 해야하나. 오히려 그런 진부한 표현은 이 묘한 분위기를 깰 것만 같아 내뱉을 수 없었다. “이봐. 너" 나? 나 말인가? 분명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긴한데.. 긴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30cm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멈춰섰다. 그의 눈동자 안에 비취는 내 모습이 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구나. 검푸른 심해의 눈이었다. “멋진 눈인걸” 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다. 차가운 손이 얼굴에 닿는가 싶더니 엄지 손가락이 눈썹위를 쓸고 지나갔다. 숨을 쉴 수가 없고 심장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따뜻해 보여” 얼굴이 점점 다가오는데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감은 눈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입술이 내려앉는데 몸이 기우는 느낌이 들어 그의 옷깃을 살짝 잡았다. 간지럽다.. 속눈썹이 살짝 혓바닥에 쓸리는 느낌이 들더니 곧 얼굴을 감싸고있던 손이 떨어져나갔다. “설마 다른 사람한테도 이렇게 쉽게 허락하는건 아니겠지?” 노노! 절대! 네버! 지금까지 당신 같은 사람은 만나본적이 없거든. “처음이야” 말을 하고나니 어째 어감이 좀 이상하다만 절대로 아니라는 결사의 의지를 담아 대답해주었다. “다행이군” 양쪽 입술끝이 살짝 올라가면서 보기좋은 포물선을 그려냈다. 나는 왠지 꿈을 꾸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분명 내가 거의 매일 찾아왔던 공원인데 전혀 딴 곳이 되어있었다. 세상이 달라보인다는게 이런걸까?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라면 분명 나라는 인간의 반쪽이 되리란걸 확신할 수 있다.(나의 끈기와 집념은 아버지께서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마디로 딱 걸린거다.) “답례해도 될까?” 나의 말에 가지런한 왼쪽 눈썹이 살짝 올라간다. 기다리게 하는건 젠틀한 신사가 할 행동이 아니지. 그렇고 말고. 따뜻했던 입술에 살짝 입맞춤 했다.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표현은 아주 미세해서 여간 포착하기가 어려운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입술이 조금 떨리는걸 느낄 수 있었다. 아쉽구나.. 그래도 목석은 아니라서 다행인걸. 헤이 다비드! 오늘 진도는 여기까지? “맹랑하군” 맹랑이 아니라 명랑이겠지. “태양아. 영화 찍을 생각이라면 씬 들어가기 전에 싸인 좀 보내주겠어? 우린 관객이 될 생각은 조금도 없거든” 빙고~ 그대의 이름은 태양! 과묵 지존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하지만 첫마디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걸. “도와줬으면 고맙다는 인사정도는 해야하는게 예의 아닌가? 모두들 못볼 걸 봤다는 표정인데” 예의범절 운운하는 인간이었다니. 다시봐야겠는걸 비너스. “괜찮다면 내가 대신 인사해도 될까? 물론 같은 방법으로” “설마 키스 하겠다는건 아니겠지?” “설마... 더 찐하게 해줄 수 도 있어” “아아...사양하겠어” 그렇다고 정색을 할 것까지야. “이름이 뭐지?” 오~드디어 통성명을! 반짝거리는 내 눈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나보다. 태양의 표정에 약간 거북스러움이. “영원. 한영원” “.....영원..” 그래. 영원 한번만 더 불러줄래? “좋은 이름이야” 감동이야 태양! 나 지금 매우 해피해~ “나 여기 더 있다가는 폭주할꺼 같아” “동감이야. 심신의 건강을 위해서 자리를 피하는게 좋겠군” 허스키, 과묵 지존은 서로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바로 뒤돌아서 공원 입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독 비너스 지존만이 남아서 여전히 불쾌한 눈빛을 보내며 우리를 쏘아보고 있었는데 그 모습 또한 어찌나 아름답던지(?) 여자건 남자건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준아 가자” 나를 잠시 바라보던 태양이 준이라 불리우는 비너스를 데리고 갑자기 발걸음을 돌렸다. 우린 아직 연락처조차 주고받지 못했는데!! 정말 그냥 가는건가.. “저기..” 불러 세우긴 했는데 뭐라고 해야되지? 가지마? 어디살아? 또 언제 만나? 무엇하나 입안에서만 맴돌 뿐 말이 되어 나오지가 않았다. 왠지 무진장 섭섭하고 서러운 느낌이 들었다. “말해” 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자 그가 재촉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되지.. 무슨 말을 해야 너를 붙잡을 수 있을까? “거기까지. 입맞춤 정도는 귀엽게 봐줄 수 있어. 하지만 더 이상 주제넘게 행동한다면 가만있지 않을꺼다” 뭐? 젠장. 니가 왜 끼어드는데? “태양이 너도” 선을 긋는 건가? 그렇다 이거지. 주제넘게 참견해서 미안하다만 그쪽에서 먼저 틈을 보여주셨거든. 이거 잘하면 내 집념이 어느 정도 강한지 시험해볼 수 있겠는걸. “연락처 좀 알려줄래” 효과 백프로군. 둘다 포커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지는데. 와우! “내 경고가 우스웠나보지?” “무슨 경고? 아! 주제넘게 행동하지 말라는거? 미안하지만 내가 주제파악을 잘 못하는 놈이거든. 도무지 어느 정도가 주제를 넘는건지 판단이 안서서 말이야” “그래? 그럼 내가 알려주지. 그 재수 없는 눈 내리깔고 태양이 이름 함부로 부르지마. 은혜를 입었으면 고개나 숙여. 니 까짓게 넘 볼 틈이란건 없으니까” 아~그러셔? 아주 겁나게 잘나셨군. 하지만 너는 나한테 그런말 할 자격없어. “짜증나게 왜 삼자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지 모르겠군. 내가 연락처를 물은건 니가 아니라 태양인데” “뭐?” “한영원” “........” “연락처 같은건 가르쳐줄 수 없어. 지금 데이트 따윌 하자는건 아니겠지?” 그래. 나는 니가 말하는 그 데이트 따위를 하고 싶어서 묻는거다. 내 눈이 멋지고 이름이 좋고 할 땐 언제고 태도가 180도 돌변하는거지? 너는 그냥 생각은 생각으로 끝나는거냐? 미련같은건 안둔다? “거기서 데이트가 왜 나와? 너무 앞서가는거 같은데.. 난 단지 내 은인에 대해서 조금 궁금할 뿐이야.” “.......솔직히 말하면 니 눈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다른 이유는 없어. 그리고 그정도 일 가지고 은인이라고 부를 것 까진 없는데” 아니. 충분해. 너에게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다면 어떤 수식어도 아깝지 않아. “학교가 어디야? 중학생 맞지?” “.........” “나는 동진중 2학년 한영원이야.” “.........” “.........” “대성중 2학년 최태양” “태양아!” 크큭. 소용 없단다 비너스. 이미 내 머릿속에 팍 꽂혔는걸. “너 이 새끼 찾아오기만 해봐” 저런저런. 그렇게 흥분하고 어린애(?) 같이 굴면 절대 이길 수 없지. 옆의 비너스가 나를 죽일 듯 노려보건 말건 태양은 걸음을 옮겼다. 밤은 깊어가는데 내 마음은 들뜨는데 달은 밝은데 바람은 찬데 가로등은 희미한데 한숨은 깊어지는데........ 우린 곧 만날 수 있겠지? 나의 16살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바람은 아직도 차가운데 가슴만은 따뜻했다.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추억에 묻혀버린 유년의 행복, 혼자서 건너야하는 삶의 가시밭 길. 시련과 고난 속에서 발견한 희망의 한줄기는 나에게 커다란 기대에 부풀게도 하고 치유하기 힘든 절망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일곱 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지만 상처가 크면 비틀거리기 마련이다. 나를 잡아 줄 따뜻한 손이 필요했다.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된다. 나는 내가 살아온 날의 곱절을 더 기다릴 수 있다. 다만 너무 늦지만 않으면 된다. 깊고 깊은 바다 속에 너의 아빠 누워있네 그의 뼈는 산호 되고 눈은 진주 되었네 - 세익스피어. [태풍] 1막2장 <에어리얼의 노래> Part 2. Lately “미국 하버드 대학 박물관에 유리꽃이란게 있데. 들어봤어?” “....금강석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는데” “그 꽃은 유리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시사철 항시 피어있고 그 우아한 자태를 뽐낸다지” “시각적으로는 훌륭한 작품이겠군” “맞아. 하지만 향기는 맡을 수는 없을거야. 나비나 벌들과 친구가 될 수 없겠지” “쉽게 깨질 것 같은데” “유리니까. 더군다나 정말 꽃잎과 같이 엷고 하늘하늘해서 조금만 충격을 주어도 부서져버린데. 하지만 부서지지 않은 것들은 영원이란 시간동안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지” “생명 없이 영원을 산다는건 무의미할꺼 같아” “나도 그래!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다고 해도 느낄 수 있는 심장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 “...........” “원추리라는 꽃 이름 들어봤어?” “.....메추리가 생각나는군” “하하. 나도 처음 들었을 땐 그 생각을 했어. 이 꽃은 백합과의 야생화인데 하루밖에 살지 못해” “하루살이 꽃인가” “응. 하지만 나물로도 먹고 한방재료로 쓰이기도 하지. 여러모로 가치있는 꽃이야” “그런데 영원아..” “.........”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유리꽃처럼 영원을 살 바에는 원추리처럼 하루를 살겠다는거니?” “.........너 정말 똑똑하구나” “그래. 짧고 굵게 멋지게 살아서 이 땅에 거름이 되거라” “너는 어때?” 태양은 대답 대신 몸을 돌리고 담배를 물었다.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난간에 기대어있는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는 방과 후 이렇게 학교 옥상에 올라와 일광욕을 즐겼는데 오늘은 태양이 옆에 있기 때문에 일광욕은 미루고 대화를 시도하는 참이다. 요 근래 태양은 집안 일(?)을 이유로 통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일주일째인 오늘 버릇처럼 학교가 파한 뒤 옥상에 올라오자 그 늠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보자마자 껴안고 러브 러브를 날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또 한번 인내심을 시험 할 수 밖에 없었다. 태양의 집안 일이란건 나의 영역 밖이기 때문에 쉽게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고 그의 곁에 좀더 가까이가고는 싶었지만 그어버린 선을 넘으면 지금의 관계조차도 깨어져 버릴까봐 그럴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거의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는 내가 같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조금씩 자리를 내주었다. 그 자리란게 뭐 특별한건 아니고 최소한 무시는 안한다는거다. 내가 그동안 받은 서러움과 갖은 핍박을 생각하면 이가 갈리지만 가지고 있는게 끈기요 남아도는게 인내심이니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내는 바이다. 나에게 끝없는 수양의 길을 걷게 했던 인물 중 하나가 휘준인데(이름도 웃기지 않은가. 예전에 비너스라 칭했던 내 입을 꼬매버리고 싶다) 예상대로 태양의 옆에서 죽마고우란 명목으로 끊임없는 러브어택을 시도하는 시건방진 녀석이다. 그리고 솔직히 따지면 나는 중학교 때 1년을 휴학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이 사실은 극비이므로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엄연히 밥그릇 수로도 월등히 앞서건만 윗사람을 공경할 줄 모르는 파렴치한 태도나 싸가지 없는 말투는 우리나라 영재교육의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거 해본 적도 없는 나나 태양이는 이렇게 반듯하건만.(태양이는 자기 입으로 말했다. 해본 적 없다고) “내려 갈까?” 태양이 담배 한 개피를 다 피울동안 상념에 빠져있었나보다. 일광욕을 하기에는 해가 산 아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너와 함께 해 지는걸 보니까 좋은데.. 넌 어때? 나는 이런 사소한 것 마저 행복으로 느껴진다. “그래” 고등학교에 들어와 태양이 본가에서 독립했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희소식이었다. 중학교때는 한달에 한번 볼까말까한 얼굴을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이젠 거의 매일을 마주칠 수 있고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달려가서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사실 그의 집안배경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들리는 후문에 의하면 소위 ‘대단한 집 자제분’이라는데 그런 것에는 애당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만일 궁금하다해도 태양이 직접 말해줄 때 까지는 기다릴 생각이다. 그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것도 나에겐 무척 뜻 깊은 일이니 말이다. “앗” 교실에 놔둔 가방을 가지러 걷는 속력을 조금 빨리하는데 갑자기 멈춰선 태양의 등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코를 문지르며 옆으로 고개를 기울이자 처음 보는 사람이 태양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르고 분위기가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그 표정 좀 어떻게 할 수 없니? 유독 나한테만 그러더라” “.........여긴 왠일이야?” “왠일은 보고 싶어서 왔지” “.........” “안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 태양에게 예뻐졌다는 말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 남자는 장신의 키에 상당히 매력적인 마스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태양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는 저 한마디에 별로 발끈조차 하지 않는 그의 태도에 알 수 있었다. 결코 저런 말을 듣고 그냥 넘어갈 성질이 아니라는거다. “기다리고 있었어. 지금 나가려던거 맞지?” “날 왜 기다리는데?” “당연히 너랑 같이 가려고 기다렸지” “난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마음 없어. 그러니까 꺼져” “하하하.” 꺼지라는 말에 왜 저렇게 통쾌하게 웃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조금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미친놈이 아닐까? 그래서 태양이도 상대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는 걸까? “뒤에 있는 분은 누구야?” 상당히 예의바른 미친놈이군. 눈이 약간 휘어지면서 부드러운 웃음을 만들어냈다. 나는 사람의 첫인상에 그다지 호감을 두지 않지만 이 사람은 상대를 집중하게 만드는 어떠한 마력(?)이 있는 것 같았다.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신경꺼” 갑자기 싸가지 없는 말투로 돌변한 태양은 내 팔을 잡고 교실로 들어갔다. “가방 챙겨” 가방은 챙기겠는데 너무 살벌하게 말하는거 아니야? 예감이 좋지 않았다. 태양은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렇게 눈에 띌 정도로 동요한다는 것은(그래봤자 말투가 싸가지 없어진 것 뿐이지만) 상대에게 심적으로 좋던 나쁘던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거다. 저쪽 말투를 봐서는 꽤 친한 것 같던데. “누구야?” 가방을 짊어지면서 슬쩍 물어봤다. 내 물음에 눈살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지 않는다. 이럴 경우 계속 캐묻는다고 해서 말해 줄 위인이 아니므로 대답을 듣는 것은 포기했다. 복도에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장신의 남자가 다가왔다. “차 가지고 왔어” “아직 안갔나?” “널 두고 어딜가겠어” “뚫린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귀찮게 하지 말고 니 갈길 가” “완전 살얼음이군. 관심 좀 가져주라~” 오..저 체구에서 저런 느끼한 애교가. 점심 먹은게 올라올 것 같군. 태양은 들은체도 하지않고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사연이길래 이리 박대를 당하는고. “녀석 성질하고는..” “.........” “태양이 친구?” 뭐 친구라고 하기엔 가깝고 연인 이라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랄까. 개인적인 소견 이다만. “실례합니다.” 간단히 목례를 하고 벌써 복도 끝으로 사라지고 있는 태양의 뒤를 쫓았다. 그가 내 행동에 살짝 얼굴을 구기는 모습이 보였다. 미안하지만 태양이 적대하는 상대에게 호의를 가지고 대할 수는 없어서.. 태양의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 또한 폭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는 주변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모으는 묘한 힘이 있었다. 흔히 권력자 주변의 아첨과 아부를 일삼는 소인배들이 아니라 진정 친구라 부를 수 있고 서로를 아껴주는 믿을만한 사람들 말이다.(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면 제 풀에 나가 떨어지더라) 그의 특별한 친구관리 비법이 있다면 일단 물욕이 없고 배려할 줄 알며 예의를 지킬 줄 안다는 것이다. 물론 친구들을 대할때의 이야기지만 요즘은 나에게도 그런 면모를 많이 보여주고 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그에게 내가 다시 한번 반한 이유이다. 처음 반한 이유는 외모와 멋들어진 싸움 실력이었는데 그에 반해 성격이 개차반이었다면 4년동안 그의 그림자를 밟고 다니진 않았을거다. 나는 나의 반려에 대해서 상당히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태양을 만나기 전까지는 아버지께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주신 나의 ‘어머니’가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다.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는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정일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우아한 자태를 잃지 않았으며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이 풍부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기울이실 줄 아는 분이셨다고 한다. 나에게 어머니의 사진이 몇 장 있는데 모두 무릎까지 오는 단정한 치마를 입고 양손을 다소곳이 모은 뒤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사진들이다. 이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는 사진은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벛꽃이 만개한 진해의 어느 길목에서 다정스레 팔짱을 끼고 행복한 듯 서로를 바라보고 웃고 계신 사진이다. 보고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 많은 날을 눈물지으셨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아버지가 울리신거예요?’라고 물었는데 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만일 훌륭한 직업을 가진 엘리트집안의 자제분을 만났더라면 부모님을 등 질 일도 모진 고생을 할 일도 없었다고 했다.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변한 직장하나 없는 아버지를 만나 사람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글쟁이 노릇 뒷바라지 한다고 갖은 고생은 다 하셨는데 나를 낳자마자 돌아가셨을 때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때 나는 어머니에 대한 한없는 연민에 눈물을 뚝뚝 흘렸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절대 불평 한마디 없었다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어려운 살림쯤이야 별거 아니라면서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 아버지는 글쓰는 일을 그만두고 포장마차 일을 하셨다. 어린 나까지 부양하려면 당장에 돈이 필요했고 어머니가 남기고간 하나밖에 없는 생명이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기 때문 일거다. 왠지 나는 어머니의 목숨과 맞바꿔 세상에 나온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래도 나 때문에 살아 갈 힘이 있다면서 눈물짓곤 하셨다. 아마 어머니께서는 혼자 계신 아버지가 안쓰러워 조금 일찍 부르셨나보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이젠 많이 참을만하니 하늘에서 두 분이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내가 태양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그의 주변사람들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일 수도 있다. 나야 신경써줄 사람이 없어 부담을 덜 느끼지만 태양이는 다를꺼다. 우선적으로 나의 마음을 태양이가 받아주는게 가장 큰 과제일지 몰라도 그와 관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어필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일단 그의 친구들부터가 나를 탐탁치 않아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준은 그렇다 치더라도 과묵한 승권이나 허스키보이스 성록은 은근히 나를 적대시하고 무시하는데 그럴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찔리는 느낌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여린 심성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상처를 두 배는 더 받는다. 니들이 사랑을 알어? 젠장.. “빨리 따라오던지 갈길 가던지 둘 중에 하나만 해라” “같이가” 뒷모습을 조금 감상하고 있는데 참을성 없이 재촉한다. 평소엔 안 그러는데 오늘은 확실히 이상했다. “바로 집으로 가는 거야?” “그래” “저녁 뭐 먹을까?” “.........” “먹고 싶은거 있어? 내가 해줄게” “너 참 가지가지 한다” 내가 가지가지 할줄 아는게 많긴 한데 그래서 덕보는건 너잖아. “왜? 내가 하는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잘 먹었잖아” “맛이 없다는 말은 아니었어” “.........기분이 안 좋아?” “기분과 식욕의 상관성에 대해 말하는 거라면 맞아. 지금 식욕이 없어” “그럼 입맛 돋굴 수 있는걸로 해줄께. 그럼 되지?” “.......마음대로” 참 내조하기도 힘든 인간이구나. 나의 손맛과 정성이 들어간 음식을 맛보는 영광을 매번 누리면서 감동한번 안하다니 만드는 나로서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었지만 다 팔자소관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태양의 원룸은 올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너무 삭막하다. 일단 학교와 가까워서 위치는 좋은데 혼자살기엔 너무 넓고 또 거기에 비해 가구가 너무 없다. 취향을 존중해주긴 하겠다만 아늑하고 따뜻한 걸 좋아하는 나와는 너무 상반되는 취향이라 기회가 되면 꼭 고쳐주고 싶다. “집엔 별일 없어?” 나는 태양의 가족이나 ‘집’의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으므로 포괄적인 의미를 담아 넌지시 물었다. 소파에 몸을 기대려던 태양이 내 물음에 멈칫하고는 조금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다들 잘 계시냐구” “누구를 말하는 거지?” “......너의 가족들” “내 가족?” “.........” “니가 나의 가족에 대해 뭘 안다고 그런걸 묻는거지?” 역시 타이밍이 안 좋았나. 아까부터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신경 쓰지 못하고 질문의 도가 조금 지나쳤나보다.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가시돋힌 말을 내뱉었다. “말해봐. 내가 언제 가족에 대해 너에게 말한 적이 있었나?” “아니.... 난 그냥..... 안부가 궁금했을 뿐이야. 다른 뜻은 없었어” “넌 가끔 도가 지나칠 때가 있어. 내가 배려해줄 수 있는 선에서만 놀아” 배려? 나에게 배려해줄 수 있는 정도가 겨우 이거니? 나는 너에 대해 궁금해하고 알아서는 안되는거야? 태양을 잘 모르겠다. 몇 년을 바라봤지만 그 긴 시간동안 알아온 모든 것들이 진실인지조차도 알 수가 없다. 처음 만났을 때도 느낀 거지만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조금 가까워졌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수평으로 달리고 있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 같아 두드리려하면 굳게 닫혀져있다. 힘들고 지칠 때가 많다. 나는 이제 편하게 기대어 쉬고 싶은데 너는 허락해주지 않는다. “오늘은 그냥가라. 혼자 쉬고 싶어” 기대어 쉬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어깨를 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태양은 항상 혼자 안주할 곳을 찾았다. “그래. 내일보자” 현관문을 닫고 잠시 기대어 섰다. 문 하나만 열면 다시 그를 볼 수 있고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생각으로 뜨거웠던 머리가 차가운 철문에 닿으면서 서서히 식어간다. 심장은 갑작스레 뛰는 것을 거부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버릇이 생겼다. 태양을 만난 뒤로 생긴 버릇이다. 이렇게 하면 더 빨리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았다. ‘엄마 손 약손’과 비슷한 원리(?)가 아닐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뭐하냐?” 힉! 놀랬잖아!!!!!!!!!!!!!! 기척도 없이 나타난 승권이 때문에 나는 쓸어내리던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너 발 없는 유령이냐? 도대체 어떻게 하면 기척도 없이 다가올 수 있는 거야?” “너야말로 얼빠진 표정으로 남의 집 현관 앞에서 뭐하는 건데?” “내가 보기엔 살짝 맛이 간 표정인데?” 헉! 넌 또 언제 나타난거야!! 보기 싫은 인간이 눈앞에서 알짱거리니 진정했던 가슴이 또 다시 울렁거린다. “어딜 보나 니 표정만 하겠어? 오늘은 걸지 마라. 나 힘없다.” “잡초가 힘이 없다니 지나가던 개가 비웃겠군. 내가 한번 밟아줄까? 그래야 더 강해지지” “준아. 니가 사회에 불만이 많은 건 아는데 그 모난 성질을 나한테 부리진 말아줘. 응석은 엄마한테 가서 부려... 알았지?” 아이 달래는 듯한 투로 말을 하니 조금 열받나보다. 저 녀석도 말싸움엔 절대지지 않는 성격인데 잘못 건드렸다가는 생긴 것과 전혀 딴판인 저 주먹에 운명을 달리할 수 있으므로 요령 있게 대처해야한다. 지금처럼 말려줄 사람이 한명 쯤 있는곳에서는 조금 도가 지나쳐도 무방하다. “또 기절할 때까지 맞고 싶은가보지?” 그렇다. 나는 위의 사항을 무시하고 녀석과 맞장 뜨다 몇 대 때려보지도 못하고 기절했었다. 명치를 정확히 맞고(급소를 때리다니 살인미수다) 그대로 고꾸라졌는데 방치해두고 그냥 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동사 할 뻔 했었다.(살인 방조죄 추가다) 나중에 너 때문에 죽을 뻔했다고 따지니까 한다는 소리가 죽으라고 그렇게 한거란다. 그 진심어린 눈에 공포를 느꼈던 기억을 떠올리니 밥맛이 딱 떨어진다. “아...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다. 난 매저가 아니거든” “그럼 고분고분하게 말 잘들어. 수 틀리면 납치해서 쥐도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테니까”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다. 아! 내 팔자야.. 어쩌다가 이런 사이코 집단을 만나서 생고생이냐. 나는 잠시 경멸의 시선을 섞어 바라봐주고는 걸음을 옮겼다. 상대해봤자 다 나만 손해 보는 짓인 것 같다. 피곤하다 이말이다. “태양이 안에 있지?” “곱게 모셔다 놨으니까 안에 있겠지..” 오늘 사이코집단 반상회 날이니? 그렇다면 빨리 사라져 주는게 좋겠군. 저들이 서로를 끔찍이 위한다는건 몇 년동안 그 끈적끈적한 유대관계를 몸소 체험하면서 깨달은 바이다. 그리고 준은 어떨 땐 민망할 정도로 과한 애정표현을 하는데 태양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않으면(내가 보기엔 그 수위가 상식선을 넘어서는데도) 대부분 대응해주는 편이라 굉장히 피곤할 때가 많다. 지금까지 가벼운 스킨쉽 조차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일이지만 적극적으로 덤비다가는 대사를 그르칠 듯싶어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거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나의 일상은 매우 단조롭게 바뀌었다. 태양을 줄기차게 쫓아다니면서 자연스레 예전의 불량배 생활이나 친구들과는 멀어지게 되었고 같은 학교를 다니고부터는 그의 행동패턴과 동선을 파악하느라 하루의 반나절 이상을 써버리곤 했다. 한마디로 거머리같이 붙어 다녔단 말이다. 하지만 태양이 싫어하는 내색을 하거나 나의 행동에 제재를 가한적은 없었다. 나를 한 인격체로써 인정을 해주기 때문에 그만한 정성은 아깝지 않다는 거다. 언제나 그랬듯 그 자리에서 기다리면 와줄 것 같았다. 나는 학교에서 여섯 정거장 쯤 떨어진 주택가의 평수가 조금 작은 집에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이곳은 아버지의 목숨의 대가로 마련한 보금자리이므로 내게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편하게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타인의 발자국이 남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집이란 곳엔 가족이 있어야하는데 나에겐 가족이 없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따뜻한 저녁을 지어놓고 기다리시는 어머니와 공부하는 아들 힘내라며 어깨를 두드려주시는 아버지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기고 가신 유품을 보며 아파해야하는게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고 버릴래야 버릴 수 없는 감정들이기에 집에오면 참고있던 서러운 감정들이 복받쳐 오르기도 한다. 무릇 남자가 흘려야하는 눈물은 한 바가지를 넘쳐서는 아니된다 하였는데(?) 나의 눈물샘은 집에만 오면 고장난 수도꼭지가 되어버린다. 오늘같이 기분 우울한 날엔 하늘에 수 놓은 별을 보고 싶다. Part 3. Truth “오늘 수학시간 과제물 지금 거둘 테니까 내한테 다 넘겨도” 무...무어시라! 바안장~ 그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란 말인가. 수학과제물이라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봐! 반장아. 나는 그런 생소한 과제물에 대해선 들은바가 없는데..” “꼴깝 떠네. 니 한테 친근한 과제물도 있었나?” “무슨 말이야! 내가 수업에 얼마나 많은 열정을 쏟아 붓는지 알면서” “니는 열정을 자면서 쏟아 붓나? 카고 수업 끝나자마자 종례도 안하고 어딜 나르는데? 과제는 니가 나른 후에 전달 됐으니까 모를 수 밖에. 다 니가 초래한 결과 아니겠나” “야! 그럼 나한테 알려줘야 할꺼아냐” “내가 왜?” “반장이잖아” “그게 뭐?” “짝이잖아..” “근데?” “........이씨” “영원아. 니 핸드폰 있나?” “아니” “너거집에 전화 있나?” “........아니..” “그면 지금 내보고 너거집까지 친히 과제물을 가르쳐주러 납시라 이 말이가?” “..........과제가 뭔데?” “극한부터 적분까지 프린트물 내준거 풀어오기. 과정까지 싹 다.” “으으..” “괘얀타. 엉덩이 타작 열 번만해라.” “너 진짜 잔인하다. 내 엉덩이가 어디 때릴 때가 있다고 혹사를 당해야하냐?” “내가 보기엔 니는 정신을 못차린 것 같아서 머리를 좀 타작해줬으면 싶은데 잘못해가 나쁜 머리 더 이상해지면 골치 아프니까 엉덩이로 만족하라는 거다” “문우야...너는 내가 가엽지도 않니?” “가엽지..왜 안가엽겠노. 오르지도 못할 나무에 매달려가 시간을 허비하질 않나 지 앞에 닥친 현실이 어떤지도 모르고 딴데 정신팔질 않나. 니 그래가 장학금 받고 대학갈 수 있겠나? 기부금 내고 들어간다케도 니 실력이면 싫다칸다.” “대학안가” “웃기고 있네.. 가지마라 그래” “쳇” “.......” “.........프린트물 줘바바” “없다” “뭐야?” “.......” “그래그래! 내가 맞고 만다” 젠장.. 엉덩이 맞는게 제일 너무 기분 나쁘다. 탱탱하고 토실토실한 이 예쁜 힙에 멍이라도 들어봐라. 혹여 스치고 오가며 내 힙에 매혹된 낭자들이 얼마나 큰 상심과 걱정에 밤을 지새울까. 동정심도 없는 것 같으니라고.. 내가 요즘 너한테 좀 소홀했다고 이런 식으로 나오기냐? 나는 옆에 앉아있는 문우의 얼굴을 찢어져라 노려봐주었다. 하지만 절대 동요하지 않는 저 뻔뻔한 면상.. 혈압만 오른다. “맞기 싫제?” “......응” “오늘 저녁에 우리 집에 와서 저녁해라” 그러면서 무언가를 툭 내민다. 오오~ 이것은 그 문제의 수학과제물! “저녁 뭐해줄까? 흐흐” “벨도 없고 지조도 없고 자존심도 없고..잘 한다” “(빠직) 죽을래?” 이게 보자보자 하니까 정도를 넘어서는데. 니가 정녕 단매에 죽고싶은게냐? “죽일 수나 있으면서 그런 소리하나? 오랜만에 한판 뜨까?” “욕구불만이면 니 여자친구랑 풀어라. 나는 사는거 자체가 고달픈 사람이니까” “로뎅 옆에 똑같이 폼 잡고 앉아서 한 시간만 고민해봐라. 그 고달픔이 사라질꺼라” 문우는 고등학교 들어와 사귄 친구이다. 우연히도 2년동안 같은 반이되어 은밀한(?)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거의 이런 식으로 티격태격한다. 경상도 사나이라서 그런지 조금 직선적으로 말을 하는데 저 사투리는 절대 고치지 않는다.(그게 지 매력이란다. 하기야 여자애들이 좋아하긴 하더라) 이놈도 무시못할 카리스마를 소유하고 있는데 1학년 때 조금 트러블이 있어 학교 뒤에서 주먹질을 한 적이 있었다. 반장 녀석이 얼굴은 말끔하게 생겨서는 유독 나에게만 가시를 품고 말을 하는 것이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려 했건만 계속 성질을 건드려 끝내는 사나이 대 사나이로 한판 붙자..이렇게 된 것이다. 그때 쯤 나는 주먹 쓴지가 오래 되서 몸이 둔해져 있었는데 이 녀석은 운동이란 운동은 종목별로 안해 본 것이 없고 그에 따른 실력도 만만치 않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나의 ko패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예전에 싸움 좀 했었는데 몇 대 때려보지도 못하고 온몸이 압박되어버리는 기술을 당하고 나니 할말이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게 지 관심의 표현이었단다. 왜 나에게 관심을 두냐고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라고 했더니 가소롭다는 듯 한번 비웃고는 자기 할일을 하더라. “아침 먹고 왔나?” “아니 배고파..” “내려가서 뭐 좀 먹고 올래?” “라면!” “라면 같은 소리하고 있네 얼굴은 팅팅 부어가. 됐고 밥이나 한끼 먹자” “너두 안먹었어?” “그러니까 먹자 카지 내가 미쳤나? 일부러 니 밥 먹일라고 먹자카게” “말을 해도 꼭...” 짜식. 그래도 니가 나 생각해서 그러는거 다 안다. 생긴건 샤프하면서 은근히 귀엽게 군다니까..크크 약간 허기짐을 느끼면서 서둘러 문우의 뒤를 따라갔다. 나는 구내식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생존경쟁의 치열함을 한번 더 느껴야했다. 이것이 정녕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가야할 고등학생의 현주소란 말인가. 배고픔에 충혈된 저 눈을 보라.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겠다. “한영원” 응? 오호...유성록 군이 이런 누추한 곳엔 왠일? “안녕” “밥먹으러 왔어?” “응” “누구야?” 녀석이 문우를 눈짓으로 가르키며 물었다. “친구” “친구?” 귀 먹었니? 왜 눈은 가늘게 뜨고 되묻는건데. “영원아 누군데?” 응? 성록이?? 음...글쎄.. 뭐라고 불러야되지 이 녀석을. 마이 러버의 프렌드? 웃긴다.. “아는 인간” 내말에 성록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진다. 내가 말 잘못한거 있나? 우리가 친구는 아니잖아. “별로 듣기 안 좋은데. 저 녀석은 친구고 나는 왜 아는 인간이지?” 응? 오호...니가 설마 그 말이 섭섭했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야 간단하지. 문우는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넌 아니잖아.” 너무 정곡을 찔렀나? 하지만 다 인정하는 사실아냐? 내 직선적인 말에 성록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부담스럽게스리.. 그리고 잠시 문우에게 시선을 주더니 마치고 옥상으로 나오라는 말을 남기고는 식당을 나갔다. 태양의 친구들 중 준이나 승권이보다 성록은 대하기가 훨씬 부담스러웠다. 준이처럼 나를 대놓고 무시하고 모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차라리 그 묘한 태도가 더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대하기가 너무 어려워서다. 나는 성격이 잘 맞지 않는 사람하고도 장단을 맞추며 불편함 없이 지낼 수 있는데 예외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집단이 바로 태양의 친구들이다. 이것들아! 제발 보통 사람들이랑 어울려다오. “이상한 녀석이네..” 많이 이상하지. 암 이상하구 말구 “내가 니 친구가?” “........뭐?” 갑자기 문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데 이건 또 무슨 봉창 두드리는 질문이란 말인가. 그럼 니가 친구가 아니란거냐? 나는 조금 짜증섞인 눈빛으로 쳐다봐주었다. “그렇담 다행이고” “무슨 말이야..” “.....시야를 좀 넓혀봐라. 니 좋은대로 니 보고싶은 것만 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 “내 코 작어” 넌 조크도 모르냐? 어디서 눈깔을 부라리고 난리야.. 나는 서둘러 문우를 전장(?)으로 보낸 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식당의 창으로 들어오는 봄 햇살이 따뜻했다. 테이블에 팔을 괴고 잠시 눈을 감아보았다. 시간이 지나자 주변이 조용해지고 눈앞으로 하얀색 나비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나의 코 위에 앉아 날개 짓을 한다. 하얗고 투명한 날개가 부서질 듯 반짝거린다. 다른 나비들은 주변을 팔랑팔랑 날아다닌다. 나는 손을 뻗어 내 코 위에 앉아있는 나비의 날개를 잡으려고 했다. 나비는 사람의 손이 닿는 것을 원치 않는 듯 서둘러 날개 짓을 하며 동료들과 함께 날아 가버렸다. 잡을 수 없는 안타까운 존재가 하나 더 늘었다. 나는 너를 해치려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내 따뜻한 온기가 조금이라도 전해질수 있도록 다가간 것뿐이다. “영원아” 앞머리가 뒤로 쓸리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문우가 조금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는 모두 사라져버렸다. “어디 아프나?” “........아니” “식기 전에 밥 먹어라” “응. 잘 먹을게” 계속해서 문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척하고 밥을 먹었다. 처음 식당에 올 때와는 달리 그다지 식욕이 돌지 않았다. 밥알이 꼭 모래알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칼국수가 먹고 싶어졌다. 예전에 아버지가 포장마차를 하시면서 자주 칼국수를 만들어주시곤 했는데 그 국물의 구수함과 면의 쫄깃함은 잊을 수가 없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 입천장이 데일까 천천히 먹으라며 계속 핀잔을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날까봐 칼국수는 먹지 않는다. 국물에 눈물이 범벅이 되어 간이 짜게 될까봐 칼국수는 먹지 않는다. 내가 울어버린다고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슬퍼하실까봐 칼국수는 먹지 않는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멍하니 시간만 죽인 것 같다. 도무지 활력이 없어서 괜히 청소하는 아이들 틈에 섞여 이것저것 날라보았지만 무기력함은 여전했다. 저녁은 내일 해줘도 되니까 일찍 들어가서 쉬라는 문우의 말도 듣지 않고 나는 교실 한구석에서 고독을 씹는 중이다. 씹어도 배부르지 않고 쓴맛만 나며 우울함만 던져주는 이 고독이란 녀석은 역시 상종할게 못된다.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집에 일찍 들어가봐야 청승떨게 뻔하고 밖에 나가봐야 갈 곳도 없는게 지금 내 상황이다. 아..괜히 비참해지는 이 기분.. 문우나 따라갈걸 그랬나.. “뭐해?” “엇! 태양아” 여긴 왠일이야! 나보러 온거야?? “무슨 일 있어? 왜 혼자 이러고 있는 건데” “....무슨 일은” 태양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앞의 의자를 당겨 마주보고 앉았다. “비오는데 옥상에 없을 것 같아서 교실로 와봤어” “.......응. 갑자기 왠 비가 이렇게 오지?” “우산 없지?” “응” “........어디 아픈건 아니고?” 태양이 걱정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니까 괜히 미안해진다. 나는 표정을 조금 밝게 했다. “아프긴.. 얼마나 튼튼한데. 너 내가 언제 아픈거 봤냐?” 으앗! 태양이 갑자기 뒷덜미로 손을 뻗어와 끌어당겨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긴장에 근육이 아플 정도다. 제발 예고 좀 하고 돌출 행동을 해다오~ 내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한단 말이다! “눈은 왜 피하는데?” 맙소사...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니? 너라면 이 상황에서 눈 똑바로 뜨고 마주칠 수 있겠냐? 하기야...너라면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아니다. 강심장도 아니고 철판도 아니며 뻔뻔한 뻔질이도 아니란 말이지. 너무 너무 너무 대단한건 요구하진 말아다오. “이것 좀 놓고..” “왜? 난 좋은데. 아까 성록이가 학교 마치고 옥상에 올라오라고 안했어? 비가 오면 교실에라도 왔어야지” “.........” “날더러 너 찾아오라고 여기 이렇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어?” “........깜빡했어. 생각할게 좀 있어서” 설마하니 귀하신 몸을 오라가라 하겠어? “무슨 생각?” “뭐 별거 아니야” “대답이 상당히 성의 없다. 나한테 뭐 기분 나쁜 거라도 있어?” “아냐. 힘이 없어서 그래” “.........애들이 오랜만에 몸 좀 풀자는데 같이 갈래?” “클럽?” “응” 비도오고 우울하고 혼자 있어봐야 증세만 심해질 것 같아 태양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녀석들이 자주 찾는 회원제클럽인 ‘lake’엔 태양을 따라서 몇 번 가봤는데 상류층 분위기라는 것이 내 눈엔 꼴사납게만 보여 그다지 유쾌한 곳은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태양의 집에서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냈으면 했지만 어디 그게 내 뜻대로 될 일인가. ‘나는 너와 프림과 설탕을 잔뜩 넣은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싶어’라고 대신 외쳐줄 구원자는 끝내 나타나주지 않았다. 역시나 텔레파시 전달도 실패인가보다.(매번 실패하면서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다) “교실에 있었어?” 태양과 같이 건물 현관으로 나오자 나에게 옥상호출을 언급했었던 성록이 다가오며 물었다. 나는 그렇노라고 고개를 살짝 끄덕여줬다. “준이랑 승권인 먼저 갔어. 택시 불러놨으니까 타고가자” 아까보다 빗줄기가 더 강해졌다. 나와 태양이는 뒷 자석에 탔는데 백미러로 인상좋은 기사아저씨가 어느 나라 노래인지 조금 흥겨운 음악을 따라 흥얼거리고 계셨다. “아저씨. 이거 어느 나라 노래예요?” “아...이거요. 어느 나라일꺼 같아요?” 아무래도 아시아 쪽인 것 같은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가사로 봐서 중국이나 일본은 아닌 것 같았다. “가요예요?” “네..요즘 유행하고 있는 최고인기 가요죠” “좋은데요. 여자 목소리가 고와요” “싱가포르 가요예요. 우리 딸이 그곳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내가 운전하는데 심심할까봐 보내준겁니다. 우리나라 말로 해석도 해서 함께 보냈는데 가사도 좋죠” “효녀네요. 마음씨가 착해요” “마음씨도 착하고 얼굴도 예쁘죠 하하. 딸 얘기만 나오면 이렇게 주책을 부리네요” “따님이 행복 하시겠어요” 아저씨는 거울을 통해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보시고는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셨다. 예전에 아버지의 포장마차가 너무 삭막한 듯 해서 유행곡을 담은 테이프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이렇게 해야 손님들이 좋아한다고 작은 카세트도 하나 가지고와서 틀었었는데 그 후로 손님이 더 늘어난 것 같다며 아버지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가칠한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 마다 그 온기가 온몸으로 전달되는 기분이어서 참 좋아했었다. 딸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하시는 기사아저씨의 뒷모습에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이제는 소리 내어 부를 수 없는 아버지란 이름이 못내 서운했다. 클럽 안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리 취한사람은 없는 듯 했지만 여기저기서 농도 짙은 스킨쉽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대한민국 건강한 남자인지라 흥분되고 조금 긴장도 되는데 나와 함께 들어온 두 목석들은 주위에서 뭘 하든 내 일 아니니 신경 끈다는 표정으로 일행을 찾았다. 밖에 테이블도 비어있는데 왜 굳이 방구석에 처박혀있는지 이유를 모른채 안내되는 룸으로 들어갔다. 준이와 승권이 말고도 두 명이 더 있었다. 한명은 안면이 있는 장신의 매력마스크 였고 다른 한명은 무척 세련되고 예쁜 여자였다. “어서와. 차 안 밀렸어?” “별로” 태양을 보자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을 짓던 여자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태도로 봐서 상당히 친근한 사이로 보였다. “누구?” 상당히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태양이 친구예요. 한영원입니다” “태양이 친구? 처음 보는데” “저도 처음 뵙는데요” 처음부터 반 토막 말인걸로봐서 나이는 많은 것 같았지만 예의는 영 없는 것 같았다. 나의 말에 살짝 미소 지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영원이라고 했지? 난 재협이 누나야. 얘네 들이 내가 모르는 사람을 데려온건 처음이라서 조금 놀랐어. 기분 나쁜건 아니지?” “아니예요” 장신의 남자가 재협이고 그 누나가 자신이라는 말인 것 같았다. 어쩐지 늘씬하다 했더니 그 집안 유전이구만. “데리고 오긴 누가 데리고 와. 지가 좋아서 혼자 쫓아온거지” “너 쫓아온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왠일로 준이 녀석이 가만히 있는다했다. 시비 걸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던 거다. “쫓아온건 인정하는거냐? 태양이가 없으면 집에도 혼자 못가나보지?” “태양이가 같이 오길 원하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지” “웃기는군. 너한테만 발동하는 태양이 동정심을 이용한건 아니고?” 뭐? 동정심? 나는 태양의 얼굴을 보았다. 무표정한 얼굴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그는 동정심 따위로 나를 대하진 않는다. “태양아. 저 녀석이 나만 보면 이를 세우는데 혹시 이유를 아니?” 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젠 준이 녀석과의 시비쯤이야 생활이 된 듯 재협이라는 남자와 그 누나외에는 신경 안쓰는 분위기였다. “영원이가 좋은가보지” 준과 나는 동시에 경악했다. 여자들의 사고방식이야 조금 다르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저런 결과를 유추해낼 수 있는지 뇌 구조가 궁금할 따름이다. 누님께서 계속 싱글싱글 웃으면서 우리의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는데 갑자기 싸울 맛이 싹 사라져버렸다. 준이도 마찬가지인 듯 뭐 씹은 표정이 되어 입을 다물었다. 분위기 다운되는군.. “얘네들 왜 이렇게 귀여운거니~ 내말에 둘 다 표정이 싹 변하는 것 좀 봐. 깔깔” 진짜 깔깔 웃어대는 누님에게 차마 욕을 할 수는 없어 앞에 놓여져 있는 냉수를 들이켰다. 역시 상종할만한 정상적인 인간은 한명도 없다. 어찌 저 파렴치한 녀석과 나를 태양이 앞에서 그런식으로(?) 엮는단 말인가! “배고프지?” “조금” “뭐 먹을래? 니가 먹고싶은걸로 골라” 다정하게 메뉴판을 내밀어주는 태양의 배려에 감동하는 나와는 달리 그 주변의 공기는 조금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왠지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영원이만 입이야? 우리 의견도 좀 물어봐주면 안되냐?” 재협이라는 총각이 입을 열었는데 덩치에 안 맞는 쪼잔함을 보이며 내 손안에 들어와있는 메뉴판을 힐끔거린다. 나는 조금 긴장하며 메뉴판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넌 좀 다물어라” “젠장..아직도 화났냐?” 음..둘 사이에 뭔가가 있군. 재협 총각이 왜 우리 태양이 눈 밖에 났을까. 궁금해지는데. “누나. 내가 저 녀석 데리고 나올 땐 부디 입에 재갈을 물려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어?” “아! 그건 너다운 발상이긴 한데 그래도 누나 된 입장에서 어떻게 재갈씩이나 물리겠니. 대신 사과할게. 화풀어(싱긋)” 오~ 그 정도 미소면 재협총각의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태양은 아닌 듯 했다. 아무리 지겹도록 많이 보아온 미소라고는하나 어떻게 저 녹아내릴 듯한 모습을 보고도 눈 하나 깜빡 안할 수가 있는지.. 설마 불감증은 아니겠지?(혼자 심각하게 고민해본다) “누나 요즘 선본다며?” “맙소사. 나이가 몇인데 벌써 선이야?” “누가 선이래. 아버지가 하도 닦달을 하셔서 몇 사람 만나본 것뿐이야. 만나는 족족 모두들 나한테 반해서 문제지만..” “그 높은 콧대 좀 낮출 수 없어? 우리 형이 누나 때문에 밤마다 머리 싸매고 잠을 못 이룬다구” “웃기고 있어 아주.. 내가 하늘을 찌르도록 콧대를 세워도 눈 하나 깜짝 안할 위인이야 니네 형은. 차라리 성록이라면 눈 꼭 감고 3년정도 기다려줄 수 있어” “난 연상은 흥미 없어” “흥. 웃기는 형제야. 주위를 둘러봐라 나 같은 여자가 있는지. 판단력 미숙아들 같으니라고” 누님의 말에 잠깐 성록을 쳐다봤는데 정면으로 눈이 마주쳐버렸다. 무언의 요구를 담은 눈빛은 마주하기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슬쩍 메뉴판으로 시선을 내리면서 태양을 보았다. 생각에 잠겨있는지 테이블에 놓여진 유리잔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대답대신 자세를 조금 고치며 시선을 맞추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아무말없이 계속 쳐다보기만 했다. 그 시선을 받아내기가 조금 힘겨워질 때 쯤 직원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주문을 받았다. 술이란건 그날의 기분에 따라 취하는 속도나 정도가 다른 법인데 오늘은 왠지 냄새만 맡아도 취할 것 같았다. 태양이들의 대화는 거의 집안끼리의 얘기여서 나는 별다른 할말이 없었다. 안주만 집어먹으며 듣고만 있으려니 무슨 경영권이니 집안혼사니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들만 오가서 자꾸만 동떨어진 느낌이 들었다. 앞에 놓여져 있는 술잔에 입을 대고 조금 마셔보았다. 양주는 몇 번 마셔봤지만 들어갈 땐 아무렇지도 않은데 뒤탈이 심해 한번 고생한 뒤로 거의 마셔보지 않았다. 몇 번 홀짝인 것 뿐인데 조금씩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툭’ 무언가 발을 치는 느낌이 들어 테이블 밑으로 고개를 숙였더니 맞은편에 앉아있는 성록이 계속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뭐냐는 식의 물음을 담아 쳐다봐주었더니 발을 슬쩍 뺀다. “너 얼굴 하얗게 변했어” 내가 밀가루에 세수했냐? 얼굴이 왜 하얗게 변하는데? 나는 얼굴을 한번 쓸어보았다. 조금 달아오른 것 같기도 했다. “받아” “응?” “술 받으라구” 태양은 한번도 나에게 술을 권한 적이 없었다. “나 조금 마셨어. 그만 마실래” “받아” 억지로 권한적은 더더욱 없었다. 조금 놀라서 쳐다봤는데 아까와는 달리 차가운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싫어” 내 대답이 약간 의외라는 듯 오른쪽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더니 인상을 조금 구겼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맞고 받을래?” “뭐?” “좋은 말로 할 때 받아” 장난하는게 아니었다. 잔을 받지 않으면 들고 있는 양주병으로 내려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다른 사람들도 조금 놀란 듯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잔을 들어 태양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어떻게 해야 될지 난감해서 그냥 들고만 있으려니 이번엔 마시라고 명령했다. “싫다는데 왜 억지로 그래?” 손에 땀이 고여 컵이 미끄러질 때 쯤 맞은편의 성록이 입을 열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강압적인 태양의 태도에 쓰러질 것 같았다. “니가 무슨 상관이지?” “........” “지금부터 내 행동에 간섭할 생각이라면 전부 꺼지는게 좋을거야” “...........이거 마시면 되지?” 왜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머릿속에 위험경보가 울려대고 있어 따라준 술은 마셔야할 것 같았다. 한번에 쭉 들이키고 잔을 비웠더니 눈앞이 한바퀴 도는 느낌이었다. 속이 역류하려는 것을 가까스레 참고 얼음물을 들이켰다. “잔 들어”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울컥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눈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왜 이러는거야..” “잔 들라는 말 안 들려?” “그러지마. 나 힘들어” “힘들어? 겨우 이 정도가 힘들단 말이지?” “........” “손 올라가기 전에 빨리 잔 들어” 그건 설마 때린다는 말이니? 나를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행동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이곳엔 태양과 나만이 있는게 아니었다. 왜 아무도 이런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지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미치도록 화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 있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 “헉” 자리를 박차고 나가려는 의도와는 달리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강한 힘에 의해서 다시 주저앉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손대기 싫으니까 더 이상 허튼짓 안하는게 좋을 거야” 왜 이래 태양아.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누난 좀 나가줄래?” “태양아 저기..” “나가” 누님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지더니 곧 룸을 빠져나갔다. 마음을 조금 진정시키고 사태를 파악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내가 왜 이러는지 궁금해?” 나는 고개를 들어 태양을 보았다.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한손으로 술병을 돌리고 다른 한손으로 내 턱을 움켜잡았다. “니가 알아야 될게 몇 가지 있어. 천진한 얼굴을 해가지고 내 주변을 알짱 거리는건 좋은데 이제 슬슬 지겨워지더군. 놀이가 재미없어졌단 뜻이야” “놀이?” “너 라는걸 상대로 친구 역할 해주는 놀이” “.....무슨 말이야” 갑자기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분명 나를 장난감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 태양이..나의 태양이 “흡..음..” 눈 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테이블을 타고 넘어간 태양이 준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다. 가슴을 움켜쥐었다. 저건 나의 태양이 아니었다. 짐승처럼 뒤엉켜서 서로를 탐하고 있는건 내가 모르는 사람이다.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사라지지 않았고 소리는 더 크게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칼이 잡고 있는 손목을 끊어 버리려한다. “그만해” 떨리는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왜? 그걸로 찌르려고?” 내 손에는 깨진 병이 들려져 있었다. 병이 깨어지면서 유리에 손을 베었는지 새빨간 피도 술과 함께 흐르고 있었다. 배신감에 온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이게 니가 말한 진실이야?” 이것이 너의 진짜 모습이고 내가 알아야 할 진실 이란게 이런거였어? 나는 너를 한 인간으로 사랑했다. 나는 이미 가슴에 상처가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아프기 싫었다. 너라면 나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어. 이 모든게 내 착각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진실의 일부분” “...........그래? 그 대단한 진실을 모두 알아버리면 졸도 하겠군” 태양의 검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럴 거면 왜 지금까지 가면을 쓰고 나를 대해왔는지 왜 수년 동안 너를 포기하게 만들지 않았는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지..진정 묻고 싶었다. 참지 못하고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앞에서 재수 없게 질질 짤 꺼면 나가라” 어떻게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골목을 둘러보았다. 나의 반을 잃어버렸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한걸음 디딜 때마다 가슴은 미어져오는데 어디 하나 기댈 곳도 없었다. 희미한 가로등 아래 황량한 골목은 내 어깨를 더욱 짓누르고 삶의 무게는 배가 되어버렸다. 나는 주저앉아 울어버렸다. Part 4. Sometimes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졌다. 아무래도 무릎이 깨져버린 것 같았다. 오늘따라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고 발걸음은 왜 이렇게 더뎌지는지 점점 짜증이 치밀었다. 입고 있던 교복이 땀으로 흥건해질 때 쯤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집은 평소보다 적막했다. 숨죽인 발걸음으로 들어가니 주인 아주머니께서 아저씨와 함께 울고 계셨다. 흐려진 영상 뒤편으로 모든 것이 현실 같지가 않았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 방으로 들어갔다. 많이 지친 얼굴로 가만히 누워계셨다. 소리 내어 불러보았으나 굳게 다문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가칠한 얼굴이 안타까워 한번 쓸어보았다. 조금은 나를 바라봐주어도 좋으련만 계속 고집을 부리신다. 꿈에서 어머니와 상봉이라도 하셨나보다. 다행히도 표정이 밝으셨다. 옷자락을 당기면 달콤한 꿈에서 깨어나실까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만히 눈을 감았다. 흐릿한 영상이 어둠으로 덮히면서 얼굴위로 무언가 흘러내렸다. 입에서 느껴지는 짠맛은 아마 ‘눈물’인 것 같았다. 이미 땀을 많이 흘렸는데 눈물까지 흘리면 탈수상태가 될까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부르면서 의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영원아...영원아... 애타게 부르셨단다. 대답을 하려고 이렇게 뛰어왔는데 계속 모른체 하신다. “아버지....” 하얀 백지장처럼 기억을 상실하신 듯 했다. 이젠 내 목소리조차 잊어버린 마냥 조금의 미동조차 없으셨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전국을 여행해보자는 약속을 하셨는데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가보다. 나는 울다 지쳐 엎드린 채 잠이 들어버렸다. “영원아 너 얼굴이 왜 그래?” 금일이 녀석이 놀란 눈으로 물어왔다. 하긴..지금 내 얼굴이 좀 추하긴 할꺼다. 아침에 거울보고 나도 잠시 경악했으니.. 얼굴은 그렇다 치고 아까부터 울려대는 골은 참기가 힘들었다. ‘인간이 어디까지 망가지나’를 체험하고 온 느낌이다. “잠을 못자서..” “단순히 잠만 못자서 피골이 상접 한게 아닌 것 같은데. 밤 노동이라도 한거야?” “나 능력 없다” “그거 우리나이 때 필요하긴 한데 너무 도가 지나치면 너처럼 기가 쏙 빠져버린다. 아주 건강한 파트너 였나보지?” “금일아..” “응?” “나 지금 머리가 무진장 아픈데 잘못하면 사고회로에 이상이 생길수도 있거든. 알아서 피해라” “많이 아프냐? 양호실에서 약 타다줄까?” “됐어. 좀 누워있을래” 책상에 엎드려 팔을 베고 있으려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조퇴를 해야 될 것 같았다. 내 사전에 ‘땡땡이’는 있어도 ‘조퇴’는 없었건만.. 이제 한영원도 한물 갔구만. “니 손에 이거 뭔데?” 아얏! 유리에 베인 손을 붕대로 대충 감아놨는데 그걸 문우 녀석이 건드리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자식이 조심성 없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리에 없었는데 귀신같이 나타나서는.. “뭐냐고” “보면 모르냐. 상처잖아” “왜 손에 상처가 났는데?” “그냥 좀 다쳤어.. 별거 아냐” “니 파상풍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아나? 이래 허술하게 치료해서 일찍 세상을 뜨시려고?” “무시무시한 소리 좀 그만해라. 꽃다운 청춘에 내가 왜 세상을 뜨냐?” 문우는 붕대를 조금 풀어보더니 인상을 쓰며 나를 일으켜 세웠다. 골은 울려대고 만사가 귀찮은데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양호실에 가는 도중에도 현기증이 일어나 나중에는 문우에게 거의 안기다시피해서 도착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군.. “선생님” “문우구나. 어디 다쳤니?” 문우는 학교 검도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잦은 사고로 양호선생님과 꽤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문우를 따라오거나 꾀병을 부리거나 해서 덩달아 친해졌는데 젊으신 분이라 그런지 통하는게 많았다. 거짓말 하는 줄 알면서 눈감아주고 대화상대가 되어 주신적도 꽤 된다. “어! 영원이 너 얼굴이 왜 그래?” 아아..얼굴 얘기는 이제 그만~ “그냥 잠을 좀 못자서요..” “잠 못잔거 좋아하시네. 니가 신부전증 환자가? 완전 꼴이 그지 친척 꼴이구만..” “상태를 보아하니 오늘은 꾀병이 아닌 것 같네. 이리 좀 와봐” 살짝 베인 것뿐이라 대충 연고만 바르고 잤는데 소독을 안해서 그런지 상처가 더 심해져 있었다. 정말 짜증난다. 내가 왜 깨진 유리병을 들고 설쳐댔는지 바보같이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하고 뛰쳐나왔는지 길거리에 자빠져 추하게 질질 짜고 있었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그게 너의 방식이라면 나는 순종해야 되는거냐? 분부대로 하옵소서..하며 넙죽 절이라도 해야되는거야? 나한테 그러면 안되는거 아냐? 내가 널...널 얼마나... “얼굴 들어봐라” “..읏 뜨거!!!” “엄살은..똑바로 들어라” “얌마! 얼굴에 화상 입겠다. 무식하게 왜 그래!!” “무식? 어디 가서 손은 잡아째고 얼굴은 울어서 팅팅 부은 니 뒤치다꺼리 해주고 있는데 무식하다고? 양심이 있으면 입 다물어라” “젠장. 누가 너더러 신경 써달래?” 아차 싶었다. 짜증이 나서 나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해버렸다. 문우는 얼굴을 닦아주던 수건을 든 채 움직임이 없었다. 고개가 숙여졌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한 번만 더 그딴 말 하면 진짜 니한테 신경 끊는다” “.........” “고개 들어라”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도저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신경써주는 문우가 너무 고마운데 인사조차 건네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내 손을 다 치료해주신 선생님이 조용히 양호실을 나가셨다. 꼼꼼하게 정성 드려 감긴 붕대가 상처를 모두 가려주었다. 아까보다 덜 아픈 것 같았다. 내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자 문우가 자세를 낮춰 시선을 맞추었다. “영원아” “........” “나는 니 아픈거 보면 화가 난다. 주변에 좋아해주고 아껴주는 사람들 많잖아. 일부러 기름 들고 불덩이 속으로 뛰어드는거 바보 같은 짓인거 알제? 어떤게 바른 길인지 잘 생각해봐라.” 사람들은 상식을 뛰어넘거나 이해불가능한 일들에는 거부반응을 보인다. 거부를 당하는 사람의 입장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생채기를 남긴다. 너처럼 나를 생각해주고 걱정해주는 사람은 흔치 않겠지. 너무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문우야. 태양은 나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살아갈 희망을 주었다. 너는 모르겠지만 그는 나에게 너무나 큰 존재가 되어버렸어. 이젠 등을 돌리려해도 그럴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정말 바보가 되어버린 걸까.. 언젠가 태양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등에 업고 하늘을 비행할 거야’ ‘비행청소년이 되겠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 머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그냥 늙어 죽는거야’ ‘홀아비로 늙어죽을 수도 있단 말이야?’ ‘외로운 여생을 보내게 되겠지’ ‘상상이 안돼. 주변에서 가만히 놔둘 것 같지 않은데?’ ‘.......넌 꿈이 뭐야?’ 나? 내 꿈을 말하면 넌 웃을지도 몰라. 나는 가족을 만드는게 꿈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따뜻해지는 가족 말이야. 너는 아니? 난 마마보이라 손가락질 받아도 엄마 치마폭에 숨을 수 있는 철부지를 부러워했고 술주정하는 아버지가 보기 싫타며 복에 겨운 투정을 하는 막내 도련님을 부러워했다. 심지어는 가출한 청소년들도 부러워했어. 그들은 돌아갈 집이 있으니까.. 기다려주는 부모님이 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태양이 생각’ ‘뭐가 떠오르는데?’ ‘.............뜨거워’ ‘너무 열정적인 발언인걸’ ‘..........’ ‘원해?’ ‘.........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듯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크큭.. 너 재미있어. 적극적이다가도 어느 순간 순진한 눈빛으로 벽을 세우지. 재미있긴한데.. 좀 조절 할 필요가 있겠어..’ 나는 살짝 눈을 피하고 하늘을 보았다. 구름한점 없는 하늘엔 태양만이 열기를 던지고 있었다. 만약에...니가 ‘달’이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렇다면 나는 주위의 수많은 별들 중에 하나라도 될 수 있지는 않았을까? 니가 빛을 발산하면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어져.. 너는 외롭지 않아? 얼핏 곁눈질로 태양을 봤더니 약간 눈웃음을 띄고 나에게 시선을 주고 있었다. 조금 민망해져버렸다. ‘영원아’ ‘........’ ‘나는 너를 볼 때 시선을 내리지 않아. 항상 평행을 유지했다’ ‘........널 우러러보진 않았는걸’ ‘그래..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줘.‘ ‘.......응’ 그때 태양은 따뜻한 눈을 하고 있었다. 조금은 젖어있는 것도 같았다. 사람은 변하는 걸까? 너는 변한거니? 그래도 조금은 나를 좋아해주지 않았던 거야? 태양이 나에게 던져준 진실이란 것은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건 아니었다. 그의 가정환경이나 개인적인 사생활을 모두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꺼려하는 부분이나 조금 이해가 안되는 사고방식쯤은 짐작하고 있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한건 처음이었지만 자유분방한(?) 성생활을 즐기고 있었고 그로인한 책임감도 별로 없는 것 같았으며 확실한건 내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다는 거다. 눈치를 보지 않는 것과 노골적으로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은 다르다. 그는 나에게 모욕과 상처를 던져줬으며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그와 연락이 없었다. 전화가 없는 나는 태양을 직접 만나야 연락이 닿는 것이어서 평소에도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연락두절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꽤 고민했다. 울려대는 골을 진정시키면서도 계속 태양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감당하기 힘든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널 어떻게 해야 좋을지.. 생각이 조금 길어져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까지 교실에 앉아있었다. 답은 찾을 수 없고 시간만 흘러갔다. 너를 만나야 하는 걸까. 자신이 없었다. “집에 안가?” 나는 정말 화들짝 놀라서 창문 쪽으로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잘못 들은게 아니라면 목소리의 주인공은 분명 태양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후에는 몸이 굳어버렸다. 태양이 나를 찾아왔다. “뭘 그렇게 놀라?” 특별히 드러난 표정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이 없자 앞의 의자를 당겨 앉는다. “무슨 일이야?” “........왜? 못 올 곳이라도 왔어?” “아무렇지 않게 얼굴 마주할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진 않아” “.........” “넌 다 잊었니?” “......아!”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이 태양은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어이가 없어졌다. “장난 조금 친거가지고 화났어?” “장난?” “...그래 장난” “너는 사람 마음 난도질하는 질 나쁜 장난을 즐기나보지?” 그게 장난 이였단 말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나를 기만할 셈이지. 내말에 비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표정을 싹 바꾸었다. 이제 장난 그만해. “이런... 화가 단단히 나셨군” “그래. 화났어. 그리고 니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랑 친구놀이 하는게 지겨워졌다면서 왜 또 당당하게 나타난 거지? 니 말에 책임 질 줄도 몰라?” “......내가 오지 않으면 니가 올꺼니까. 그럼 너무 잔인하잖아” 너는 지금 이까짓 걸 배려라고 하고있는거니? 도저히 그의 의중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내 말 똑똑히 기억한다고 했지?” “.......” “맞아. 너와의 친구놀이가 지겨워졌어. 이젠 더 이상 그 딴건 필요없어. 장난은 끝났어”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거야” “한영원. 도망가려해도 늦었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마라..미리 경고했다.” “알아듣게...!!!”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입술과 내 입술이 맞닿아 열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숨까지 멈추고 있던 나는 숨이 막힐 때 쯤 떨어지려 태양을 조금 밀어보았다. 그때까지 가만히 있던 그는 갑자기 고개를 살짝 비틀어 물컹한 혀로 입술 사이를 침범해왔다. 키스가 처음도 아니었건만 사고가 멈추기라도 했는지 전혀 행동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가만히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태양이 조금 적극적으로 부딪쳐왔다. 한숨인지 신음인지 모를 민망한 소리를 내뱉고 입을 열자 서로의 혀가 열정적으로 엉켰다. 아랫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고는 입안 구석구석을 혀로 애무하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몸이 뒤로 기우는 느낌에 눈을 살짝 떴는데 반쯤 몸을 일으킨 태양이 한손으로 책상을 짚고 무게를 실어 점점 넘어오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둘 다 뒤로 엎어질 것 같은데.. “태..태양아” 나는 겨우 몸을 떼고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번들거리는 태양의 입술을 보자 주체할 수 없는 민망함에 온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잊어주는 거지?” 벌써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있었다. 도대체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거지? “표정이 왜 그래?” “.........” “싫은데 억지로 당했다는 표정이네”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태양을 보았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속셈이 눈에 뻔히 보인다. 물론 나도 원한 거였지만 왠지 기분이 찜찜했다. 더군다나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지 않았는가. “언제부터 능구렁이가 된거야” 태양은 내말에 전혀 게의치 않는 듯 살짝 미소 지으면서 팔을 당겨 일으켜 세웠다. “먹고 싶은 게 있어” “........” “뭐냐고 안 물어봐?” 물론 평소 같았으면 눈을 반짝이며 물어봤을 꺼다. “뭔데?” 조금 시큰둥하게 말했다. “너” “...........” 조금 경악한 표정으로 태양을 보았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건지 내가 알던 그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너 태양이 탈을 쓴 늑대지?” “남잔 다 늑대야..너도 그렇고. 하고 싶다는데 문제 있어?” “문제 많아” “.........무슨 문제?” “적응이 안돼. 갑자기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이런...이제 봤더니 학습능력이 별로 안 좋네.. 지금까지 내가 한 말 뭘로 들은거야. 연극은 끝났어” “.....잘 모르겠어...뭐가 연극이라는거야? 그럼 지금까지 니 모습은 뭔데?” “나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진 모르겠지만 니가 알고 있는 나와은 조금 다를 수 있지”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일주일을 꼬박 고민했는데도 답이 보이지 않았는데 불쑥 나타나서는 이제 연극은 끝이란다. 너와 나 둘 중 하나가 비정상적이거나 내 머리가 나쁜게 틀림없다.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뭐 서두를껀 없지... 갑자기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해줄래?” 그래. 먹어야 살고 먹어야 사고를 하지. “얼굴은 왜 그래.. 밥 못먹고 다녀?” “......요 몇일 저녁 해줄 사람도 없고 밥맛도 없어서” 조금 푸석한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아픈건 난데 왜 니가 더 환자 같냐? 내가 없으면 밥도 못해먹는다는 말은 아니겠지? 가슴이 찡했다. 상처를 보여주면서 탓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게 만든다. “가자” 태양의 손에 이끌려 나가는데 갑자기 멈춰 섰다. 이젠 거의 아물어가는 오른손을 쳐다보며 말이 없었다. “왜? 너의 만행이 떠올라서 찔리냐?” “.......” “됐어. 이제 다 나았어” 슬그머니 손을 빼며 등을 밀었다. 태양은 별다른 말없이 다시 내 손을 잡고 교실을 나섰다. 항상 이런 날을 꿈꿔왔었다. 노을 지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손을 잡고 같은 곳을 향해 걸어가는 일. 내겐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런 일을 너는 아무렇지 않게 해줄 수가 있구나. 조금 세게 쥐어진 손이 태양의 어떤 다짐을 말하는 것 같았다. 너의 방식이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손을 놓지 않기로 결심했다. 듬직해 보이는 태양의 뒷 모습을 보면서 나는 다짐했다. 어떠한 운명이 오든지 내 가장 슬플 때 나는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는 낫습니다. Part 5. Relation “영원아 면회” 어깨를 툭 치는 손에 잠이 확 날아가 버렸다. 요즘은 왜 이렇게 아침잠이 많아지는지 모르겠다. 자습시간이 끝나고 어느 정도 여유시간이 있었는데 잠을 보충해야하는 시간을 빼앗아가려는 인물에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자두지 않으면 수업시간 내내 졸아댈게 뻔하다. 더군다나 짝이란 놈의 ‘깨움’에도 시달려야한다. 정말 괴로운 일이다. 문제지를 풀던 문우가 한심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저놈의 눈깔을 팍! “어쭈” “흥” 나는 혀를 낼름 내밀어주고는 단잠을 깨운 주범을 찾아 복도로 나왔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특별히 친구를 많이 사귄 편이 아니라 다른 반에서 나를 찾아올 정도로 가까운 사람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영원” “.....어!” 나를 불러낸 사람은 몇 번 본적이 있는 문우의 친구였다. 그의 친구들하고는 어울린 적이 없어 조금 의외였다. “정태수야. 몇 번 본적 있지?” “.........그래...무슨 일이야?”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나랑?” “조용한데로 가자” 태수는 나의 의견은 아랑곳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조금 기분이 나빴다. 사람을 불러냈으면 용건부터 말하는게 순서 아닌가. 도로 교실로 돌아갈까 하다가 문우의 얼굴이 생각나서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아마 이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나보지.. 태수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음악실이었다. 다음 시간 수업이 있는지 문이 열려있었다. “무슨 일인데?” 음악실의 교탁에 등을 기대고 나를 바라만 보고 있던 태수는 조금 짜증 섞인 물음을 던져주자 입을 열었다. “이런거 물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너 좋아하는 사람 있다며?” “.........들은거야 아니면 니 추측이야?” “둘다. 아니...추측이 아니라 확신이지. 확인 하는거야” “황당하네. 내가 왜 그걸 너한테 확인시켜 줘야 되는데?” 건방지게 다짜고짜 한다는 소리가 너 누구 좋아한다며? 문우 친구라서 체면치례라도 예의를 갖추려 했는데 마음이 바뀌었다. “뭘 정색을 하고 그래? 너도 부인하진 않네” “긍정을 하건 부정을 하건 그걸 왜 너랑 해야 되는데? 상대편 기분은 생각도 안하나보지?” “니 기분 생각해 줄 정도로 아량이 넓지 못해서...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 아까와는 달리 상당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대답을 이따위로 요구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똑같은 표정으로 응수해줬다. “대답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다. 볼일 끝났으면 갈게” “최태양” “.........” “그 녀석이지?” “.......도대체 뭐야?” “그렇게 염문을 뿌리고 다니면 모를 사람이 없지” “염문?” “더군다나 그 염문 이란게 내 귀에 상당히 거슬려. 니가 누굴 좋아하든 그건 상관없어. 하지만 니 행동 때문에 문우가 기분이 나빠진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문우? 문우와 관련이 있는 일이기에 나를 불러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의 말은 의외였다. 태수는 문우와 같은 검도부이고 죽마고우라고 들었다. 그의 눈을 보면서 나는 조금 소름이 끼쳤다. “선을 분명히 해. 어중간하게 여러 사람 성질나게 만들지 말고” “너야말로 성질 건드리지마. 니가 문우를 어떻게 생각하던지 그건 내 알바 아니야. 나는 문우를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 없어. 이런 일로 사람 불러내지 말고 문제가 있으면 둘이 해결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음악실을 빠져 나왔다. 기분이 더러웠다. 태수에게 문우가 나에게 있어 태양같은 존재라면 그건 분명 질투였다. 문우는 나를 동생처럼 가족처럼 챙겨준 고마운 친구다. 그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태양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과는 좀 다른 성질의 것이었다. 따지자면 가족애에 더 가까운 감정이다. 태수의 행동은 분명 경솔했다. “아침 댓바람부터 누가 니를 보자카든데?” 너를 사모하는 친구 분께서 나를 보자시더라. 추종자가 많아서 좋겠네 잘난 이문우씨. “그 띠거운 표정은 뭔데? 드디어 니가 겁을 상실했나?” “어떤 청순가련한 아가씨가 수줍어하면서 나더러 대신 러브 메세지를 전해 달라시더라” “맞나? 읊어봐라” “문우씨~ 오늘 화끈하고 불타는 밤 기대할께용~” “...........미쳤제?” 갑자기 쉬는 시간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내 목소리가 너무 컸나? 힐끔 주변을 둘러보니 학우들의 경악하는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럴 땐 쓰러지는 척을.. “야야.. 이제 종친다. 또 자빠져 있지 말고 똑바로 앉아서 수업 들어라” “차지마! 내가 공이야?” “.........니가 공은 아니지..”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기분 탓이려니 했다. 툭하면 발길질에 손찌검이다. 내 언젠간 기필코 저 버릇을 고쳐놓으리.. 수업시간이 지났는데도 선생님이 들어오시지 않자 문우가 교무실로 내려갔다. 반장이란 참 피곤한 직책인 것 같다. 물론 나야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리더쉽이나 명석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것도 때론 피곤하겠단 말이다. 하겠다고 나서지 않아도 자연스레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문우같은 타입은 매사에 자신이 나서서 일을 해결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있지 않을까.. “선생님 일이 생겨서 쪼매 늦으신다니까 자습하고 있자” 앗! 그럼 옥상에 잠깐 올라가봐야겠다. 태양이가 있을지도 모르는데.(태양의 땡땡이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자리에 딱 앉아라” “....화장실 갈거야” “쉬는시간에 뭐하고 지금 가는데? 참아라” “야! 생리적인 현상을 어떻게 참냐? 선생님도 안계시잖아” 이게 왜 이렇게 날 들볶아대는 거지? 한참의 눈싸움이 지겨워질 때 쯤 나는 무시하기로 결심했다. “오분안에 안돌아오면 땡땡이로 간주하고 처절한 응징이 있을 줄 알아라” 하나도 안 무섭다. 문우의 협박을 뒤로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복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참 따뜻했다. 문득 옥상에서의 일광욕이 하고 싶어졌다. 태양도 있으면 금상첨화일텐데.. 기대에 부풀어 옥상 문을 열었건만... 나는 큰 실망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인물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이었다. “표정 한번 리얼하군” 바로 뒤돌아 나가기도 뭐해서 쭈빗거리며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평소엔 잘 보이지도 않던 녀석이 왠일인지.. “수업 안들어가냐?” “남말하지마” “태양이가 아니어서 실망이 큰가보지?” 알면 다행이구나. 성록이 왜 나의 아지트(?)에 발을 들여놓은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 커다란 불청객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난간이 몸을 모두 지탱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조금 위험한 자세로 몸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왠지 바람이 땅속 기운을 타고 나에게 전달해주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았다. “이봐. 위험해” “앗” 갑자기 허리를 잡는 손에 깜짝 놀라서 몸이 난간 밖으로 기우뚱했다. “뭐하는거야!” “너야말로 뭐하는거야. 떨어질뻔 했잖아” “니가 잡지 않으면 떨어질 일도 없어. 저리 비켜” 지나친 접촉과 흥분하는 성록 때문에 너무 당황해버렸다. 도대체 왜 시키지도 않는 짓을 저리도 잘한단 말인가? “비키라니깐!!” “.........너 왜 그러는거야?” “뭐가? 뭘 왜 그래?” 이 인간이 왜 비키라는데 비키지도 않고 이러는지 모르겠다. 무엇에 화가 난건지 표정도 곱지 않다. 넌 인상 쓰면 더럽게 살벌하단 말이야. “마치 날 벌레보듯 하잖아” “.......접촉이 부담스러울 뿐이야..” “겨우 허리 좀 잡았다고 너무 과민반응하는거 아냐?” “나 원래 과민하고 예민해. 알았으면 좀 비켜줄래?” “웃기는군. 태양이 한테는 잘도 들러붙더니. 갑자기 없던 체질이라도 생겼나보지?” “이봐. 너도 나랑 이러고 있는거 별로 유쾌하지 못할텐데 왜 구구절절 따지고 드는거야? 비키면 되잖아” “내가 불쾌한건 지금 니 행동이야. 도대체 뭐가 잘났길래 손하나 까딱 못하게 하는거지?” “니가 나한테 손하나 까딱할 이유는 또 뭔데?” “...........둔한 거냐...아님 여우 짓 하는 거냐?” “뭐..뭐가 어째?” 이 망할 놈이 지금 여우라고 했겠다. 도저히 말로는 안되겠군. 나는 다리를 살짝 들어서 녀석의 정강이를 내려찍었다. 아니..내려찍으려고 했다. 하지만 살짝 돌린 시선으로 옥상 문 앞에 서있는 인영을 발견하고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태양이 굳은 표정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맙소사.. 지금 이 상황은 오해를 안할래야 안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성록의 두 팔이 나를 사이에 두고 난간을 붙잡고 있었고 나는 그를 밀어내려고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상태였다. 이걸 뭐라고 설명한단 말인가. “떨어져” 성록 또한 놀랐는지 황급히 몸을 뒤로 뺐다. “지금 둘이 연애질이라도 하고 있는건 아니겠지?” “오해하지마” “.....무슨 오해? 현장을 직접 목격했는데 발뺌 하려는건가?” 한없이 가라앉은 눈동자가 지금 그의 심리상태를 대신해주고 있었다. 조금 무서워졌다. 젠장! 일이 왜 이렇게 되는거야. “진짜 오해야. 난 지금 이 녀석을 한대 패주려고 했었다구” “뭐하자는 거야. 유성록” 태양은 내말을 무시해버리고 성록에게 다가갔다. 이거야 마치 바람피다 현장을 들킨 것 같지 않은가. 심장이 진정하지 못하고 계속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너랑 뭘 하자는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어” “장난해?” “............한영원이 니꺼야?” 나는 성록의 질문에 심장이 떨어지는줄 알았다. 그의 눈이 장난을 치거나 어설픈 농담을 하는게 아니라는걸 알려주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태양은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영원이가 물건도 아니고 니꺼 내꺼 따지는건 우습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잠시 감정에 충실했을 뿐이야. 기분 상했다면 미안하다” 성록은 말을 마친 뒤 태양의 어깨를 한번 쳐주고는 옥상을 빠져나갔다. 나는 아직 어정쩡한 자세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태양이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보다는 표정이 많이 풀린 듯 했다. “충분히 뿌리칠 수 있는 상황이었어. 날 가지고 놀겠다는 심산은 아니겠지?” “.......” “그렇다면 신중하게 생각하는게 좋을꺼야. 성록이보다 너한테 더 화가나니까” “아냐...뿌리치려고 했었어. 정말이야” “.......널 받아들이기로 한 이상 내 눈밖에 나는 행동은 자제해줘. 한번만 더 이런 식으로 인내심을 시험한다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이런 일이 있을 경우 태양이 말하는 그 처벌(?)에 대해서 겁이 날 법도 하지만 나를 받아들였다는 그 말에 먼저 감동 해버렸다.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얼굴을 한번 쓰다듬은 태양의 손이 머리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팔을 둘러 그의 허리를 감싸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향긋한 향기가 코 주변을 맴돌았다. 나는 지금 아마도 행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장난하나? 장난하나?” “아악! 아파!!” “오분 안에 들어 오랬더니 아예 수업을 땡땡이쳐?” “가..갑자기 빈혈이 일어서...양호실에..” “양호실? 지금 가서 확인해보까?” “아~ 수업 종 울리겠네. 다음시간이...문학...” “지랄.... 니 죽고 싶제?” “반장. 제발 언어순화 좀 해라. 허구헌날 욕이야..욕이..” “..........내 경고를 무시했다 이거제? 니가 이제 간이 배밖으로 나왔구나” “아이~ 한번만 봐주라. 도저히 마음이 심란해서 수업이 안될 것 같아서 그랬어” “그렇게 따지면 여기 앉아서 수업하고 싶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노. 왜 이렇게 말을 안듣는데? 엉?” “지금부터 열심히 들을께! 아자!” “..........으휴” 내 머리를 한대 쥐어박은 문우는 잔소리를 중지하고 수업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역시 문우에게는 필살애교(?)가 무기다. 자꾸 신경쓰게 하는건 미안하지만 엄마 같은 저 잔소리는 대부분 나를 즐겁게 한다.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싫은 소리를 해주는 사람이 옆에 없다면 아마 많이 외로웠을거다. 나는 지금 상당히 기분이 좋다. 태양이 학교를 마친 후 같이 만날 사람이 있다고 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만나보면 알꺼라면서 무진장 궁금하게 만들었다. 아마 오늘 수업내용이 내 머릿속에 들어온다는건 바늘구멍에 황소가 지나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거다. 자꾸 웃음이 나온다. “여기가 어디야?” 태양이 나를 데리고 간곳은 분위기가 좋은 카페였다. 운치(*고아한 품격을 갖춘 멋)란 이런 곳을 표현하는 단어일거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는 곳이었지만 태양과는 잘 어울렸다. 그는 마치 여기 주인이라도 되는냥 당당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에서는 은은한 종소리가 울리고 카페 안에서는 조용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양아! 여기”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자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소리나는 쪽을 보았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까만 생머리의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태양과 닮아있었다. “기다렸어?” “조금.. 답답해서 일찍 나왔어” 태양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았다. 조금 어리둥절했다. “인사해. 영원이야” “아.. 안녕하세요. 최정희예요” “네. 안녕하세요” 궁금함을 담고 태양을 바라보았다. 정희라는 여자를 웃음기담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부연설명이 필요했다. 여자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내 여동생인데...사실 동갑이야” 쿵! 그럼 이란성 쌍둥이란 말인가? 그런 말은 한번도 하지 않았잖아. “다 말하지 않았어? 조금 놀란 표정인데.. 우린 배다른 남매예요” 뭐? 배다른... 맙소사. 정말이야? “어머니가 달라요.... 태양아. 니가 설명 좀 해. 미리 말을 안한거야?” “지금 알려주고 있잖아. 그래서 널 소개하는거야” 입안이 타는 것 같아서 앞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배다른 남매라니..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내가 태양의 가족일에 관심을 보일 때마다 냉정했던 건 이런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나.. 말문이 열리지 않았다. “너한테 소개시켜 주려고 약속을 잡은 거야. 뭘 그렇게 충격 받은 표정으로 보는거야” “........놀랐으니까..” “알만해요. 태양이가 평소에 이런 이야기 전혀 하지 않았을 테니까..” “........” “얘기 많이 들었어요. 같은 학교 다니고.....또 어떤 사이 인지도..” 다 말한 건가? 정희씨의 표정이 그리 밝아보이지는 않았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미리 귀뜸이라도 해주지.. “처음엔 조금..아니 많이 놀랐지만... 태양이가 결정한 일이니 믿기로 했어요. 이 사실을 아는사람은 가족들 중 저 혼자 뿐이예요” “걱정해주는 거야?” “당연하지. 넌 그럼 걱정도 안되니? 내가 다 조마조마한데..” 정희씨는 마치 철없는 동생을 달래는 표정으로 태양을 나무랐다. 배다른 남매라면 당연히 껄끄러운 관계를 예상했는데 친남매보다도 더 다정해 보였다. 태양과 닮은 부분도 많았지만 정희씨는 따뜻해보였다. “영원씨라고 불러도 되죠?” “네. 물론이죠” “여기 식사도 되니까 먹고가요. 어떤거 좋아해요?” “아무거나 잘 먹어요. 정희씨가 맛있는걸로 추천해줘요” “그럴까요?” “나한텐 안 물어봐?” “너도 아무거나 먹어. 내가 추.천. 해줄테니까” 정희씨는 약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이 참 예뼜다. 태양이 손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래저래 잘난 것들은 유전의 영향이 크구나.. “영원씨는 전체적으로 남자답게 생겼는데 이목구비는 조금 여성스러운 것 같아요” “네?” 갑작스러운 정희씨의 외모평가에 놀래서 카페 전경을 감상하고 있던 시선을 돌렸다. “많이 궁금했어요. 태양이가 마음에 둔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아...실망하셨나요?” “아뇨. 그런 말이 아니예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영원씨 참 좋은 인상을 가졌어요” 민망도 하여라. 조금 뻘쭘해져서 태양을 힐끔 쳐다보았다. 한손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슬쩍 입꼬리를 올린다. 지금 나 놀리는거지? “칭찬에 좀 인색해라. 착각에 빠질지도 모른다구” “표현을 해야 상대방이 알아주는거야. 영원씨 앞길이 구만리예요. 이 녀석이 애정표현에 어찌나 서투른지 많이 가르쳐야 될껄요” “저도 어떻게 가르쳐줄까 고민이예요” “니가 날 가르치겠다고?” 그래. 넌 내가 4년동안 얼마나 많은 애정을 쏟아부었는지 좀 알아야되. 정희씨 반만 닮아봐라. “어떻게 가르칠건지 궁금해지는데” “좀 참아. 차차 알게 될 거야” “기대되는군” 정희씨 말대로 음식은 상당히 맛있었다. 나는 여러 가지를 맛보면서 과연 이런 음식들을 내가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늠해보았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희씨는 고고학에 관심이 많고 상당히 조예가 깊었다. 나는 고등학생이 그런데 관심이 많다는 것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정희씨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그것이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또한 이야기도 굉장히 맛깔스럽게해서 듣는 이로 하여금 집중력을 가지게 하는 능력도 있었다. 그녀는 매력적이었다. “유물의 형태를 보면 알 수가 있어. 그 시대에 어떤 변화가 있었고 생활양식은 어땠으며 그 형태의 변화가 어떠한 시간적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이야. 과학으로 이해가 이루어진다는게 신기하지 않아? 난 처음엔 고귀한 유적을 발굴하는 환희에 매력을 느꼈지만 원시적으로 발로 뛰어다니며 삽질을 하는 것보다 그 유적이 가지는 의미와 사연을 연구하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 레이더스같은 영화에서 보여지는 흥미진진한 모험 같은게 다는 아니란 말이야” “다행이야. 니가 만약 유적을 발굴하는데만 정신이 팔려 전국팔도를 다 돌아다닌다면 아마 어머니께서 도시락 싸들고 다니면서 말리셨을껄” “안 그래도 못마땅해 하신다구. 아마 부모님을 이해시키는 일은 힘들 것 같아. 내가 일주일 전에도 장작 두 시간동안 한국 고대사를 설명하느라고 진땀을 뺐는데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뭔줄알아?” “잠만 오는구나” “정말이지 실망이 커. 아마 내가 손을 잡고 전국 박물관을 다 보여주어도 지루하다고 하실 분들이야. 차라리 돌이한테 설명을 하는게 덜 답답할 것 같아” “돌이?” “우리집 똥개” “맙소사. 비글 보고 똥개라고 하는건 너밖에 없을 거야” “비글?” “사냥개의 일종인데 뭐 뜻은 요란하게 짓다, 작다.. 대충 이런거야. 스누피알아?” “응..만화에 나오는..” “스누피 모델이 바로 비글이야. 성격은 많이 틀리지만. 이 녀석이 보통 고집이 센게 아닌데 태양이만 보면 꼬리를 내린다. 신기하게도..쿠쿡” “아...” 대충 이해가 간다. 성격 더러운 개도 꼬리를 내릴 정도라니. “그런데 개 이름이 왜 돌이야?” “아~ 그건 처음에 돌이 녀석이 왔을때 계속 방안을 빙빙 도는거야. 안절 부절을 못하는거 있지. 그래서 그냥 돌이라고 지었어. 태양이 머리에서 나온 이름이지만..” “.....좀 단순무식해보여..큭” “개 이름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있나? 그리고 난 개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그래...늘 똥개라고 부르지. 정말 듣는 사람 민망하다니까” 나는 정희씨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도 매끈한 말솜씨도 보이지 않는 배려도.. 태양에게 이런 가족이 있다는 건 나에게도 큰 행운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승권이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이었다. 워낙에 말이 없는 승권이라 사실 그녀와 잘 어울리는지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녀가 좋아해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내가 편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오늘 성록이도 그렇고 나는 사람들을 너무 내 시각에서만 보고 판단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성록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승권이도 같이 올걸 그랬나? 뭐 같이 와도 한 사람 없는 셈 치겠지만 그래도 나랑 둘이 있을때는 자상한 편이라구” “누가 뭐랬어?” “영원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워낙에 말이 없잖아..” “응. 너무 말이 없어서 정희랑 그런 사이라고 하니까 조금 놀랐어” “하하. 그게 천성이야. 나두 처음엔 뭐 이런 남자가 다 있나 싶었지” “그래도 승권인 니가 산꼭대기의 유물을 발견하면 기꺼이 삽을 들고 달려갈걸” “그럼~ 내가 세뇌교육을 얼마나 시켰는데. 아마 우린 머지않아 함께 고고학을 연구하는 동반자가 될 거야” “멋진 것 같아” “이봐. 정희 말에 그렇게 귀기울이면 너도 모르게 이 찻잔이 골동품으로 보일지도 몰라. 난 절대 삽질하는 취미 없으니까 알아서 해” “영원이가 관심이 있다면 내가 적극적으로 지원해줄 의향이 있어” “난 분명히 싫다고 했어” “니가 왜 영원이 관심사에까지 감놔라 대추놔라야. 그건 엄연한 월권 행위라구” “내가 싫으면 영원인 안해” 아하..물론 니가 싫어하는걸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기란게 생긴다구.. “갑자기 관심이 있어졌어. 그 고고학이란거에 대해 말이야” “뭐?” “훗.. 이게 바로 역효과라는거지. 너의 그 자만심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구나” “말이 좀 거슬린다” “폼 좀 그만 잡을 수 없니? 나한텐 안 통한다는 걸 아직도 인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 태양은 피곤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조금 남아있는 홍차를 들이켰다. 전면이 유리로 되어있는 카페의 야경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와 그리고 그의 가족과 함께 이렇듯 행복한 저녁을 보낼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너를 만나 여러 해를 바라보면서 알게 모르게 희망이라는 불씨가 조금씩 꺼져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머리로는 부정했지만 마음까지 부정하기엔 현실이 너무 냉정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들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Part 6. Date 미치도록 좋은 날씨란 이런 날씨를 말하는걸까? 주말인데다가 아침부터 쨍하는 태양과 더불어 기분 좋은 바람이 솔솔 불어오니 환경에 민감한 내가 집중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문득 머릿속에 여행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 나는 한번도 여행이란 걸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살아계실 때는 산으로 바다로 참 많이 놀러갔었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보다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가르침’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비록 내가 학교성적은 그다지 해맑음이 되지 못했지만 건강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을 한없이 자랑스럽게 여기신 분이셨다. 그때는 나를 닮은 아들이 있으면 꼭 아버지같이 해주리라 마음을 먹었었다. 이제 그 꿈은 조금 현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오늘 약속 있나?” “오늘? 왜?” “있나 없나?” 방과 후엔 바로 태양에게 직행하는게 일상이 되어버려 따로 약속을 잡는다는건 생각지도 않는다.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태양과의 데이트에 시간을 투자해야 되지 않겠는가. “태양이한테 갈껀데....” “........태양이가 니 남편이가? 열녀났네” “뭐야... 왜 시비야?” “그래. 이제 친구는 눈에도 안 들어오제? 그 딴 식으로 해봐라. 국물도 없다.” 유치하게 왜이래. 나는 툴툴대며 가방을 챙기는 문우를 보며 조금 무안해져 버렸다. “오늘 무슨 일 있어?” “됐다” “야아~ 그러지 말고 말해봐. 들어봐야 결정을하지” “들어봐야 결정을 해?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는거지 그 어중간한 태도는 뭔데? 사람 놀리나?” “........” “누구는 아쉬워서 니 찾는 줄 아나. 요 근래 우리 밖에서 만난 적 있었나?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우리 집에도 오고 그러더니 이젠 아주 발을 끊어버리네. 필요할 때만 친구다 이거제?” “........내가 소홀했던건 미안한데..그렇게 생각한건 아냐” “생각을 못한 것도 잘못이지. 니 머릿속에는 그 인간 생각밖엔 들어갈 자리가 없나? 솔직히 니한테 실망이 크다” 문우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가방을 매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져있던 나는 서둘러 문우를 따라나섰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다. 태양에게 온 신경을 쓰다보니 당연히 문우까지 챙기는 일은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내가 필요할 때만 찾은 것 같아 많이 미안해졌다. 옆 체육관 건물 쪽으로 가는걸 보니 아마 검도부에 일이 있는 것 같았다. 걸음도 얼마나 빠른지 도착할 때쯤엔 숨이 차올랐다. “문우야!” 막 들어가려던 문우를 불러 세웠다. 멈춰선 문우는 뒤돌아서서 숨을 고르고 있던 나를 내려다보았다. 허리를 약간 굽히고 있던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몸을 세웠다. 조금 어색했다. “얘기 좀 하자” “해라” “여기서?” “.....들어가봐야 된다” “연습있어?” “아니” “그럼?” “....할말이나 해라” 평소에도 무뚝뚝한 녀석이 화를 내니까 감당이 안된다. 저 말하는 싸가지를 봐라. 맘 착한 내가 참아야지.. “그렇게 말하고 가면 내가 무진장 미안하잖냐. 내 죄는 내가 알겠으니까 앞으로 잘할게 화풀어~” “...어떻게 잘할껀데?” “응? 그야...이 한 몸 바쳐서 열심히! 그러니까 화내기 없기. 알았지?” “니 몸까지 바치겠다니 마다하진 않겠다만 자신은 있나?” “........어째 좀 이상하게 들린다..” “왜? 니가 방금 그랬잖아. 몸 바쳐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그런 뜻이 아니잖아..능글맞게 왜이래” “그럼 말을 꺼내지를 말던가..”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와서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나는 순간 정조의 위험을 느꼈다. 아무래도 오늘 문우가 단단히 틀어진게 틀림이 없다. “오..오늘 저녁에 전화할께. 나 먼저..” “겁나나? 걱정마라. 니를 어찌해볼 생각이 있었으면 벌써 옛날에 그랬지” “무..뭐?” “......오늘 내 건드리지 말고 곱게 사라져라” “너 무슨 말이야” “왜? 몰랐다고 말하고 싶나?” “문우야...나는..” “됐다. 알고 있으니까 니가 확인까지 시켜줄 필요는 없다. 니 입으로 듣고 싶지도 않고” 무슨 말이든 해야겠는데.. 그에게 상처를 줘서는 안 되는데 어떤 말을 꺼내야 될지 알 수가 없었다. 문우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한동안 나와 눈을 맞추고는 몸을 돌려 체육관으로 들어갔다. 긴장을 했는지 얼굴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식으로 문우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먼저였다면...아마 나는 그를 선택했을거다. 하지만 이미 내 선택은 결정이 나버렸다. 번복할 수도 되돌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었다. “넌 인복이 많구나” 소리나는 쪽으로 힘없이 고개를 돌리니 태수가 비꼬는 듯한 웃음을 띄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진이 빠질대로 빠져 더 이상 누구와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선을 똑바로 그으라고 말했을텐데..” “.......” “하기야...니가 선택할 수는 없어도 남주기엔 아깝겠지..” “.....말 함부로 하지마” “아니면 왜 이도저도 아닌 모호한 행동을 취하는 거지?” “넌 뭐야? 너야말로 좋아하는 상대한테 제대로 고백조차 못하면서 왜 내 행동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거지? 이런다고 니 마음을 문우가 알아줄까? 우리 둘 사이에 니가 끼어들어 뭐라한들 그건 소용없는 짓이야. 원하는 걸 얻으려면 직접 상대방에게 표현하는게 제일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전에도 말했지만 둘 문제...헉” 갑자기 잡혀진 멱살 때문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니까짓게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거야? 감정표현? 내 감정이 이러니 그걸 니가 알아줘야한다고 말하면 모든게 해결되는건가? 그래. 니 말대로 그건 문우와 내일이지 너랑은 상관없어. 하지만 난 문우의 선택을 존중해. 그래서 그가 상처받으면 나도 상처받아. 상처받았으니까 너한테 화나고 똑같이 상처주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더더욱 화나는 일이지” 멱살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가 숨이 막혀왔다. 하교하는 아이들이 지나가면서 힐끔거린다. 태수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정태수. 그 손 못 놓나?” 태수는 문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때서야 손에 힘을 풀었다. 갑자기 숨이 트이자 사레들린 듯 기침이 나왔다. 아마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을 거다. “뭐하는 짓인데?” “.......” “씨발.... 지금 뭐하는거냐고” “보면 몰라? 이 자식이 성질나게 해서 멱살 좀 잡았다” “뭐? 영원이가 니 성질을 건드렸다고? 그래서 멱살 좀 잡았다고? 이 개새끼야 말 다했나?” “.........너 지금 욕했냐?” 젠장. 이러다가는 진짜 큰 싸움이 날 것 같았다. 나는 둘 사이에 무작정 끼어들었다. “비켜라” “문우야 잠깐만. 그냥 태수랑 얘기 좀 하다가 격해져서 그래. 이렇게 화낼 일 아냐” 목소리가 쉬어서 나갔다. 식은땀 흘리고 당황하고..지금 내 꼴이 좀 안타까울 꺼다. 뒤에서 태수의 분노를 담은 살기가 느껴지고 문우는 차가운 눈으로 태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진짜 미칠 것 같았다. “아.. 날씨도 더운데 땀도 많이 흘리고 어지럽고...” 진짜 어지러워서 이마를 짚으며 주저 앉아버렸다. “젠장...일어나라” 땅으로 꺼지기 전에 문우의 손이 내 팔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갑자기 연약한척해서 미안하지만 사태수습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거니 생각하고 문우가 이끄는 체육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수를 슬쩍 돌아보니 이마를 짚고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마음이 많이 상했을거다. 짝사랑의 경력이 화려한 나이기에 충분히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 지금으로썬 최선일거라고 생각했다. 체육관 안의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했다. 그제서야 좀 살 것 같았다. “태수가 오늘 처음 저러는거가?” “........” “말해봐라” “........응” “......잊어라” 내가 최소한 닭대가리는 아니란다. 잊으란다고 금방 잊어지면 그게 사람 머리냐? 문우가 건네주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세면대에 잠시 기대섰다. 날씨가 좋아서 좋아라 했더니 이렇게 배신을 할 줄이야. 현기증이 빨리 사라지지 않아 짜증이 났다. “문우야..” “.......” “내가 너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글쎄..” 분위기 초치기는. 남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진심을 담아 말을 하는데.. 조금 노려봐주었더니 무미건조한 시선을 슬쩍 피한다. “모르면 알아줘. 그리고....태수한테 잘해줘라” “가를 니가 왜 신경쓰는데?” “니 친구잖아....그러니까 나한테도 친구잖아..” “니 친구하는건 좋은데 잘해주니 못해주니 그것까지 참견할 필요는 없거든. 니 일이나 잘해라” “너 자꾸 정떨어지게 말할래?” “붙어있는 정은 있었나?” 아아..그래. 너 삐진거 아니까 그만 좀해라. 피곤하단 말이야. “혼자 걸어갈 수 있제? 니 때문에 뺏긴 시간 물어내라고 안할 테니까 조신하게 교실로 올라가라..” “.........” “뭔데 그 애처로운 눈빛은? 부축이라도 해달라는 거가?” “제대로 읽어봐. 이건 니 싸가지 없는 말에 대한 원망의 눈빛이라구” “눈빛이 통하려면 애정이 오고가야 되는거 아니겠나? 전혀 모르겠는데” “너 오늘 아침에 버터랑 밥 비벼먹고 왔지? 무진장 느끼해...” 문우는 나의 경악한 표정에 코웃음 치고는 화장실을 나갔다. 저 녀석의 주 특기가 바로 사람 바보 만들기인데 나는 진짜 바보가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사람 진을 빼놓는건지 모르겠다. 만만한게 나다 이거지..젠장 시계를 보니 종례가 끝나고 벌써 40분이나 지나있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내 처지를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사람 상대하고 어울리는게 제일 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시험평균 70점(내 기준에선 어마어마한 점수다)을 넘는 것 보다 더 어렵지 않은가. 이놈이나 저놈이나 도대체 레벨이 좀 맞아야 내가 평균 조절을 하던지 노력을 하던지 할꺼 아니겠냔 말이다. 다른 사람 하루 늙어갈 때 나는 그 열배는 빨리 늙어가는 듯한 이상한 증후군에 시달리며 하루가 다르게 출중한(?) 외모가 퇴색해감을 몸소 실감하고 있다. 이건 분명 국가적 손실이요 국제적 망신(?)이라고 이 연사 힘차게 외치는 바이다. 오늘 점심 메뉴는 삼겹살로 결정했다. “어디 갔다 오는거야?” “앗...언제왔어?” “정확히 30분 기다렸어” “정말? 미안. 일이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 꼴이 그 모양이지?” 꼴이라니.. 내 꼴이 어때서? 나는 교실 뒤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았다. 조금 힘이 없어 보이고 땀 흘린거 말고는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태양은 교실창문을 등지고 앞의 의자에 발을 올린채 지루하고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그의 표정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리 교실까지 친히 발걸음 하셨다는 것에 위안을 삼고 나는 싱긋 웃음을 보내줬다. “호러가 따로 없군” 이런! 고작 30분 기다린거 가지고 너무 티 내는거 아냐? 나는 지를 몇 년 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빨리 가방 챙겨” “.......알았어..알았다구” 발은 좀 치워줄래? 도대체 왜 내 가방을 발밑에 깔아두고 뭉게는거야. 필기구와 수학문제집만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어짜피 책 많이 넣어봤자 가방만 무겁다. “니 친구는 체육관까지 배웅을 해줘야 검도가 잘되나보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나는 태양에게 머물렀던 시선을 살짝 옆으로 돌린 뒤 교실 창문에서 체육관까지 모든 시야가 확보됨을 깨달았다. 아까 전에는 아이들까지 몰려있어서 확실히 눈에 띄였을꺼다. 그런데 태양이 어떻게 문우가 내 친구이고 검도를 하는 것까지 안단 말인가. “아....누가 멱살을 잡힌 채 하교길 한복판에서 쇼를 하고 있길래..” “........그냥...오해가 있어서 조금 다툰 거야..” “무슨 오해?” “.......” “말을 안하시겠다” 설명을 하기가 난감했다. 태양에게 숨기는게 있는건 싫었지만 이런 복잡 미묘한 감정문제까지 털어놓기엔 내 어휘구사력도 문제이고 그가 하해와 같은 넓은 아량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없어서 조금 꺼려지기도 했다. 나는 더 이상 태양이 그 일을 거론하지 않길 바랬다. “그럼 니 친구한테 물어봐야 겠네” “뭘 물어 본다는거야” “어떤 오해를 했길래 멱살을 잡고 늘어졌는지 이유를 알아야겠어” 니가 언제부터 내 일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거냐. 평소 같으면 콧방귀도 안뀌고 무시했을 일을 잡고 늘어지니까 대처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태양은 꼭 들어야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안든데. 그래서 나도 니가 마음에 안드니까 서로 신경 끄자고 했어” “.............한영원” “........” “우유부단한 행동 집어치워. 마음가는대로 휘둘렸다간 후회 할꺼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휘둘린 적도 없었고 내가 마음대로 행동했다고 해서 특별히 잘못될 것도 없었다. 태양의 말은 다분히 공격적이었다. 기분이 상했다. “무슨 뜻이야?” “........따라 나와” 태양은 내 기분 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따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이건 무슨 주종관계 같지 않은가. 나는 대등한 연인관계를 바란 거지 명령 따위나 하는 싸가지 밥 말아먹은 태도의 주인을 바란게 아니다. 분노한 기분으로 재빨리 태양을 따라갔다. “야! 너 나한테 왜 그래” “........” “내가 뭘 잘못했다고 쌀쌀맞게 구는 거야” “억울하면 그딴 자식한테 멱살 잡히지마” “.........” “검도부를 다 뒤집어놔야 말을 듣겠어?” 살다보니 별일도 다 있다. 태양이 나를 대신해 복수를 해준다는 듯한 내용의 저 대사는 조금 전의 분노에 찬물을 끼얹고 드라이아이스로 찜질을 해주었다. 할말을 잃은 나를 한심한 눈으로 보더니 거칠게 팔을 잡고 이끌었다. 왠지...왠지...황홀해지는 기분이었다. 점심메뉴로 삼겹살을 외쳤더니 태양이 흔쾌히(?) 나를 근처의 고기 집으로 인도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먹는 거라 맛이 기가 막혔다. 입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었다. “삼겹살 처음 먹어?” “오에마에 머거 (오랜만에 먹어)” 막 상추에 싸서 입에 넣는데 말을 시켜 발음이 이상하게 세어나갔다. 태양은 마치 내가 걸신에 들린 사람인양 안타깝게 쳐다보았다. “천천히 먹어” 이상하게 나만 먹는 것 같아서 상추쌈을 하나 내밀었다. 태양은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내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넌 쌈을 눈으로 먹냐? 팔 아파. 빨리 먹어” “..........됐어” 왜 고개까지 돌려가며 마다하는지 모르겠다. 그만 좀 튕겨라 제발.. “먹을 때까지 들고 있을 거야” 내 굳은 의지가 전달됐는지 태양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잠시 지은 뒤 손에 있던 쌈을 입으로 가져갔다. 내가 손수 싸주는 거니까 영양가가 두 배 일거다. “이봐....바보같이 실실 웃으면서 먹으니까 다 흘리잖아. 더럽게 왜 그래” “태양아. 우리 이거 먹고 뭐할꺼야?” “.......” “영화볼래?” “.......” “싫어?” “먹으면서 말하지마. 다 먹고 말해” 대화를 하면서 음식을 먹어야 소화도 잘되고 섭취율도 높아지는 거란다. 나는 못마땅한 표정을 한껏 지으며 남은 음식을 먹었다. 지금까지 태양과 같이 식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매번 소식을 한다는 거다. 나보다 배는 더 먹어야하는 저 덩치에 적은 양을 섭취하면서 어떻게 그 몸매를 유지하는지 미스터리할 뿐이다. 분명 마른 몸은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조금 걸었다. 태양은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대부분 지하철이나 택시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했는데 급할 때나 바람을 쐬러 시외로 나갈 때는 바이크를 이용하기도 했다. 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건 일부러 검소한 생활을 하겠다는 것 보다는 스스로가 인위적인 것을 조작 하는거 자체를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함께 어디를 여행하거나 학교 주변 말고는 딱히 가본 곳도 없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실행에 옮길 날에 대해 약간의 설레임을 가지고 있었다. 태양이 제안할 때까지 먼저 말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가 언제쯤 나에게 데이트신청을 할지 조금...아니 많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잠깐 들어갈래?” 태양이 가리킨 곳은 생과일주스를 파는 조그마한 가게였다. 좀 더웠는지 연신 손을 흔들어 얼굴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예뻐 보여 나는 살짝 웃었다. 가게안은 시원했다. 갑자기 땀이 식는 느낌에 조금 소름이 끼쳤다. 우리는 창을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아직 밖의 열기가 느껴지는지 태양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미간의 주름을 펴주었다. 그는 웃을 때가 매력적인데 인상을 쓰면 그 매력이 반감한다. “비라도 좀 퍼부었으면 좋겠다” “맞으려구? 지독한 산성비야. 머리빠 져” “여름은 싫어. 젠장할 더위가 올해는 더 심하겠지” “그래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엔 0.5도 이상은 오르지 않아. 다행인일 아냐?” “1년에 5도씩은 상승하는 것 같아. 내 몸이 비명을 지른다구” “까맣게 태우면 멋질 것 같은데..” “뭐?” “니 몸 말이야” “일부러 태울 생각은 없어. 너나 한번 해보지 그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아마 탄 감자 같을 걸” “잘 익은 고구마 같을지도..크큭” “.........놀리지마. 어딜 가도 나만한 인물은 없다구” “.....드물지. 넌 좀 특이하거든” “좋은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좋을대로..” 우리는 다시 걸었다. 태양과 함께 이렇게 오랫동안 걸어본 적이 없어서 마냥 좋기만 했다. 약간 땀에 젖은 태양의 앞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열기 때문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묘하게 선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아랫도리가 뻐근해지는 느낌이었다. 길거리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올랐다. “치이는군” “응?” “더운데 사람들이 부대끼잖아. 좀 한가한데로 가자” 태양의 의견에 따라 우리는 큰길 옆의 골목길로 진로방향을 바꾸었다. 건물 때문에 그늘도 생겨 아까보다 시원했고 사람들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았다. “어디까지 걸어가는 거야?” “글쎄..” 특별히 목적지를 두고 걷는 건 아닌 듯 했다. 조금 더 걸어가자 큰 건물들 때문에 시야가 모두 가려버렸다. 나는 이 높은 건물들이 나무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건물 숲에는 신선한 공기도 향기로운 풀냄새도 없었다. 오로지 일상에 지친 사람들의 한숨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영원” “.....!!” “혼자서 어디가는거야?” 태양이 20m쯤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딴 생각을 하느라 그가 멈춘지도 몰랐다. “부르는 소리 못 들었어?” “잠깐 생각 좀 하느라고..” “나랑 있으면서 딴 생각을 한다 이거지?” “여긴 너무 답답해” “여기?” “응.... 삭막하고 건조하고 무의미해” “이제까지 잘 살았으면서 왜 그래” “마지못해 산거지” “사막에라도 떨어진 것처럼 말을 하는군” “이곳의 오아시스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 아마 닿기도 전에 지쳐버릴 거야” “경쟁자를 걱정하기전에 먼저 니 능력을 믿어보는게 어때?” 태양은 바람에 넘어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주면서 미소지었다. 후일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지만 아름다운 미소에 먼저 취해버렸다. 하늘을 채색하고 있는 자연의 색깔은 그 단면만을 보면 한없이 예뻐서 일부분을 전부라고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양면을 모두 보아야 진실을 알 수 있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다. 한 눈 팔면 코 베어갈 무서운 세상에 사랑을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잃는 것을 두려워하기 전에 먼저 용감해져야한다. Part 7. Tangle 그가 태양의 집에 들이닥친건 내가 막 카레를 완성했을 때였다. “가정부로 취직했냐?” “.........왠일이야” “냄새 좋네. 나도 맛 좀 보자” “저리 좀 비켜줄래” “많이도 했네. 태양이 혼자 다 먹으려면 질리겠다” “니가 그런 걱정 안 해줘도 되니까 식탁에 좀 앉으라구” “배고픈데 잘됐네. 난 니가 있을줄은 몰랐지..” 재협은 손가락으로 뜨거운 카레를 살짝 찍더니 입으로 가져갔다. 나는 그의 행동을 기가 막힌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맛있네. 너 요리사해라” “한번만 더 손대면 몽땅 얼굴에 부어버린다” “태양이 샤워해?” 나의 협박 따위는 옆집 개짖는 소리보다 효과가 없는 듯 그는 욕실 쪽으로 여유롭게 걸어갔다. “같이할까?” 나는 욕실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재협의 느끼한 대사에 경악한 표정으로 뛰어갔다. “너 지금 무슨짓이야!” 나의 외침에 웃옷을 벗어던지던 재협이 고개를 돌렸다. 도대체 왜 자기가 태양과 함께 샤워를 한단 말인가. 처음 볼 때부터 범상치 않은 줄은 알았지만 이제 보니 완전 미친 게 틀림이 없다. “왜? 남자끼리 샤워 하는게 이상해?” “태양이 나오면 해” “왜 그래야 되는데? 난 지금 당장 하고 싶어” “야! 거기가 대중 목욕탕이야? 샤워기도 하나고 공간도 좁은델 왜 둘씩이나 들어간다는거야” “욕실 넓어” 재협은 내 말은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바지까지 훌렁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맙소사. 그는 노팬티였다. 나는 믿을 수가 없어 그가 벗어던진 바지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해보았지만 있어야 할 속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거 완전 변태 아냐? 주방으로 돌아왔지만 진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시 욕실 쪽으로 가서 문에 귀를 가까이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태양은 왜 저 녀석이 들어가는데도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는단 말인가.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았는데 그 소리조차 미세하게 들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들고 있던 숟가락이 설거지 한 듯 깨끗해 질 때까지 물고 빨고 안절 부절을 못했다. ‘쿵’ “악!” 갑자기 밀려진 문에 제대로 맞아 머리가 깨질 듯 아파왔다. 하필이면 귀를 대고 있을 때 열어 젖힐건 뭐람.. “뭐하냐?” 태양이 아래에 타월 한장만 두르고 머리를 수건으로 털면서 니가 왜 여기 있냐는 식의 물음을 던졌다. “둘이 뭐한 거야!” “........뭐하다니. 샤워한거 안보여?” 열린 문틈으로 슬쩍 보니 재협은 샤워기 아래서 몸을 씻고 있었다. “너야말로 문 앞에서 뭐하는 거야? 관음증 있냐?” “.......(발끈) 아무 일 없었지?” “.......카레 했어?” 이것들이 오늘 동문서답하기로 작정을 했나 하나같이 질문에 대답 하기을 회피한다. “저것 봐..” “.......?” “노 팬티야. 내가 분명히 확인했어..” “..........그게 어때서?” “뭐?” “나도 가끔 그래” 태양은 그게 뭐 대수로운 일이라고 일러바치느냐는 투로 말하며 가소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재협과 태양의 머리를 통째로 끓는 카레에 집어넣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앞으로 저 녀석하고 절대 같이 들어가지마” “........” “대답 안해?” “......그만해” “뭘 그만해? 내가 지금 이러는게 이상한거야?” “내 말은...천천히 하자는 거야. 생활방식을 하루아침에 바꾸긴 힘들잖아” “그럼 저 녀석이랑 같이 샤워 하는게 생활이 되어있단 말이야?” “.......재협 이랑은 어렸을 적부터 습관이 되서 그래” “....난 잘 몰라. 니가 말을 안해 줬으니까. 그리고 둘이 사이 안 좋은거 아니었어?” “니가 안 좋을 때 본거겠지” 주방으로 가는 태양을 따라 들어가면서 오늘은 기필코 궁금한 것들의 해답을 모두 얻으리라 다짐했다. 우선 배가 고프니 밥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약한 불에 올려놓았던 카레를 접시에 덜었다. 카레특유의 냄새가 집안 곳곳에 배어갔다. “내껀?” “.......니가 퍼다먹던지” 주객전도에 적반하장이다. 나를 정말 이 집의 가정부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짜증나서 흘겼더니 보란 듯이 코웃음 친다. “건방지지만 않다면 우리 집으로 스카웃 할 용의는 있는데..” “충분히 건방지니까 그럴 필요 없어” “재미있군. 지겹진 않겠어” “.......누구한테 하는 말이야?” “누구겠어. 일탈을 꿈꾸는 두 얼굴의 악마 말이야” 재협은 머리위로 손가락을 올려 뿔을 만드는 흉내를 내며 약올리듯 말했다. 태양의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닥치고 밥 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나가줘야 겠는데..” “닥치고 먹기엔 이 카레가 너무 맛있어서 말이야. 영원이 너 나한테 전수 좀 해라. 집에서 이쁨받게” “굳이 요리로 이쁨 받아야 할 만큼 눈밖에 난거야?” “바야흐로 내가 사랑에 눈을 뜨고 난 뒤부터였지. 내 방식을 사람들에게 다 이해시키긴 힘들더라고. 그래서 요즘은 다른 방법을 연구 중이야. 아직까지 완전히 등 돌린 사람은 없으니 내 노력여하에 달렸지” “......불륜이라도 저지른거야?” “상상력도 풍부하셔라. 참고로 난 임자 있는 여자한테는 관심 없다구. 남자면 몰라도..크큭” “너 게이야?” “바이섹슈얼(Bi-Sexual). 임자 없는 여자한텐 관심 있어” “그걸 어떻게 알지... 자신이 바이인지를..” “........간단해. sex해보면 알아” “......”“왠 정색?” “그게 고등학생이 꺼낼만한 말이라고 생각해?” “넌 경험 없어?” “......” “하하. 완전 물건이네.. 태양이 너 능력 있다” “여자랑은...” “....여자랑은 해봤다고? 할 꺼 다 해봐놓고 순진한 척은..” “누가 순진한 척을 했다는 거야? 난 잠시 분위기에 휩쓸려서... 충동적이었단 말야” “동기야 어떻든 결과는 매한가지 아냐? 그래...첫 경험은 어땠어?” 식사 중의 대화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묵묵히 밥만 먹고 있는 태양은 어느새 그릇을 다 비워갔다. “태양아 밥 더 줘?” “됐어. 잘 먹었어” 태양은 물을 마신 뒤 책을 한권 끼고 소파에 앉았다. 재협과는 어릴 때부터 친구사이였다면서 둘의 대화는 ‘밥 먹자’, ‘응’ 정도가 끝 이였다. 내가 있어서 둘의 대화를 단절 시키는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말씹기 능력평가가 있다면 넌 만점 받겠다” “........” “처음 봤을 때 알아봤지.. 너 라는걸” “....무슨 말이야?” “어땠어? 태양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처음 봤을 때를 회상한다면 아직까지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수줍은 사춘기 소녀같은 감상을 내 놓을 순 없었다. 그 느낌을 말로 형용한다는게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우린 서로 눈빛에 끌렸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 높디높은 자긍심에 끌렸겠지. 차갑고 아름다운 얼굴에 끌렸겠지. 거침없는 행동과 말에 반해 버렸겠지..” 자조적인 재협의 말투는 마치 자신의 느낌을 털어놓는 것 같았다. “조심해야해.. 그 늪은 너무 깊어서 한번 발을 내딛으면 빠져나오기 힘들 거야” “민재협” “네..네...닥치겠습니다. 너 카레에 술 넣었냐? 취하는 것 같다..” “난 멀쩡해” “.....넌 멀쩡하지 않아.. 이미 머리에 알콜이 꽉 차있어. 그래서 니가 만든 카레가 이렇게 독한거야” “.........물 줄까?” “얼음물” 재협은 보기보다 센티멘탈(sentimental)한 면이 있었다. 태양이 입을 다물고 있자 나의 말상대가 되어줬는데 가끔씩 신경 긁는 소리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은 대화상대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태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들려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태양은 몇 년 전만 해도 살얼음판이라고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자세히 들려주지 않았지만 얼마 전에 만난 정희와의 관계를 볼 때 그가 그리 화목한(?) 환경에서 자라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잘 지내는 것 같아 안심이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자고가도 되지?” “풉” 마시고 있던 주스를 도로 컵에 뿌린 다음에 입을 닦으며 노려봐주었다. 놀러온 건 좋지만 내가 이 집의 주인은 아니지만 태양이 아무 말 안한다지만!! 절대 그것은 허락할 수 없다. “안돼” “웃기지마” 나의 외침과 동시에 태양의 입에서 나온 말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덕분에 재협의 얼굴은 불만투성이의 얼굴이 되었지만.. “너 삼일째 집에 안 들어간다며?” “.......” “누나한테서 들었어. 민회장님 화 단단히 나셨 다더라. 골프채로 어디하나 부러지기 싫으면 빠른 시일 내로 들어오는게 신상에 좋을꺼라고 하던걸” “.....넌 내가 왜 집에 안 들어가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집에 안 들어가는게 하루이틀이어야 궁금도하지. 내가 니 걱정을 밥먹듯이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야 되겠어?” “흥. 밥먹듯은 고사하고 하루에 한번이라도 내 생각이란걸 해봤어? 정 떨어지는 놈..” “지금 너 때문에 나까지 고민해주고 있잖아. 왜 때늦은 반항을 하고 난린데” “반항이 아니라 방황이다. 나도 빨리 종지부를 찍고 싶은데 주위에서 도움을 안준다” “.........오늘은 내가 집에 전화 드릴테니까 여기서 자. 그리고 내일 아침 회장님 출근하시기 전에 들어가서 빌어” “외박 몇일 했다고 빌어?” “아님 골프채로 대가리 터지던가” “젠장. 말하는거 하고는..” “............나도..” “........” “나도 자고갈래” “너도 집나왔냐?” “식을 제공했으니까 돌아오는 숙이 있어야지” “그건 어느 나라 속담인데?” “누가 너랑 단둘이 밤을 보낸다는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내가 태양일 잡아먹기라도 한다는거야 뭐야.. 관음증에 의부증까지 골고루하네” “너...” “그만! 둘다 소파에서 자던지 마음대로 해” 태양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이 녀석은 친구고 나는 연인(공식 선언한 것은 아니지만)이 아니던가. 저 큰 침대를 놔두고 날더러 소파에서 자라니 이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냔 말이다. 재협은 이미 침대에서 자길 포기했는지 벌써 소파에 자리 잡고 몸을 눕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같은 기회(?)를 놓칠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살짝 일어났다. “태양인 누가 옆에 붙어 자는 거 싫어해” “........그걸 어떻게 아는데?” “같이 자봤으니까” 나는 조금 무거워진 몸이 견디기 힘들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재협은 나를 보지 않고 천장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도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아... 어릴 때부터 친했다고 그랬지..” “.........무슨 뜻인지 알잖아” “........”“난 니가 싫지 않아. 그래서 충고하는건데... 착각도 정도껏 해라” “착각이라니?” 내 물음에 재협은 시선을 돌려 눈을 맞추었다. “태양이 너를 사랑하게 될꺼라는 착각” “........우린 서로 좋아해” “그런걸 두고 착각이라는 거야. 물론 너를 좋아는 하니까 옆에 두는 거겠지. 하지만 더 이상은 바라지 않는게 좋아” “.........왜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준이 알지?” “준이?” “아마 태양이에게 대쉬하고 준이한테 몸 성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걸” “.......준이 태양이의 뭔데?” “글쎄... 잘은 모르지만 너나 내가 바라는 태양이와의 관계를 독차지하고 있는 녀석이겠지..” 그런 사실은 들어본 적도 눈으로 확인한 적도 없었다. 준이 태양을 따르고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재협의 말은 내가 아는 사실과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마지막에 선택받는 사람은 따로 있다는 사실이지. 괜히 마음만 상하고 하고 기분은 더러워” “.........장담하는거야?” “넌 멀리서 4년을 바라봤지만 난 가까이서 10년을 넘게 봐왔어” “........” “준이 보통 녀석이 아니거든. 받는 건 배신 남는 건 상처뿐이지..” “나를.......정희한테 소개시켜줬어” “정희?” 재협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제 서야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의 가족을 만났다는 건 태양이 나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그 또한 해석을 했을거라고 생각했다. “정말이야?” “.......응” “하하. 널 정희한테 소개했다 이거지?” “좋은 여자 였어” “좋은 여자?.....물론 좋은 면도 많이 있지..” “그 삐딱한 말투는 뭐야?” “좋은 여자인지 여우같은 계집인지는 최소한 다섯 번은 만나보고 판단 하는게 좋을거야” “여..여우?” “난 정말이지 태양의 색다른 모습을 볼 때마다 그 껍질을 하나씩 모두 벗겨버리고 싶어져. 왜 자꾸 내 본능을 자극하는지 모르겠군..크큭” “........제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나 행동은 삼가 해주면 좋겠는데” “아아...그래 자제하도록 하지.. 하지만 즐거운 걸 어떻게 해” 그는 말처럼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왜 정희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어느 정도를 진실로 받아들여야 될지도 판단이 서질 않지만 분명한건 나를 적대시해서 모두 꾸며내는 말은 아니라는 거였다. 그의 눈은 어쩌면 많이 지치고 슬퍼보였다. 혼란스러운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건 겨우 그 정도였다. 상대방의 눈을 읽는다는 건 사람을 사귐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태양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나를 바라봄에 있어 진실 되었다는 건 알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그에 대해 귀를 귀울이다 보면 아마 판단이 흐릿해서 진짜 그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눈이 진실하게 보이는 이상 그를 믿기로 했다. “나 옆에서 자도 되지?” 몸을 옆으로 틀고 있던 태양은 내 목소리에 자세를 바꾸었다. 찌푸린 얼굴에서 짜증이 묻어남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슬쩍 한쪽 다리를 올리고 침대에 몸을 옮겼다. “내가 저기서 잘까?” “........왜? 같이 자면 안돼?” “안돼” “........” “니가 여기서 자라” “싫어. 같이 자” “너 지금 그게 무슨 말인지 알고나 하는 거야?” “침대도 넓은데 왜 그래. 좀 떨어져서 자면 되잖아” 태양이 조금 난감해하는 사이에 재빨리 침대위로 올라갔다. 반쯤 몸을 일으킨 태양은 누워있어서 조금 삐쳐 나온 머리를 하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주시했다.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옆으로 누워 슬쩍 웃어주었다. 그는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다시 몸을 뉘였다. 창밖의 달빛이 커텐 사이로 들어와 나른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눈에 익은 태양의 모습은 무척 환상적이었다. 왜 사람들이 밤의 여왕에게 혼을 빼앗기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주한 그의 눈은 마치 나의 혼을 빼내서 흡수할 것 같은 깊은 눈이었다. 까만 눈동자가 더욱 깊어진다 싶더니 갑자기 다가왔다. 그가 나의 눈에 길게 입맞춤 했다. “가까이 와봐” 옆으로 당겨져 그의 가슴에 가까이 닿자 자세가 조금 불편해졌다. 한쪽 다리를 태양의 다리사이에 집어넣었다. 얼굴을 목덜미 쪽에 묻고 팔을 허리에 두르니 완벽한 포즈가 되었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찔러와 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 부비적거렸다. 이렇게 좋을 수가.. “영원아” “응?” “가만히 있어라” “왜?” “나 변하면 무섭거든” “.......어떻게 변하는데?” “봐서 좋을 거 없어. 지금 무진장 참고 있으니까 조심해” 귓가에서 바로 울리는 저음은 나를 미치도록 흥분시키기 시작했다. 한번 의식하자 겉잡을 수가 없었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지고 몸이 뜨거워졌다. 숨이 거칠어지려하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것 같아 태양의 다리사이에 있던 내 다리를 슬쩍 뒤로 빼내려했다. “어허..” “.....태양아.......나.......” “...........이런” 울상이 되어버렸다. 이 지경(?)이 될 줄 내가 알았겠는가. 워낙 건강하다보니 본능을 억제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아..쪽팔려.. “으앗!” “쉿. 재협이 깬다” 갑자기 몸을 타고 위로 올라온 태양은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체중을 실었다. 가만히 있어도 흥분되 미칠 것 같은데 중심이 맞닿자 거의 넘어갈 것 같았다. 덜컥 겁이 났다. 남자끼리 어떻게 하는지 이론적으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직접 몸으로 느끼는 것의 차이는 실로 엄청났다. 흥분과 두려움에 머리가 뒤죽박죽이었다. “소리 죽여” 머리 양옆을 팔꿈치로 짚은 뒤 하체로 체중을 실어 마찰하기 시작했다. 나의 생각과는 달리 그 말로만 듣던 ‘애널섹스’를 체험하진 않았지만 가슴 떨리게 하는 상대방과 몸이 맞닿아 체온을 느끼며 사정을 하는 건 자위를 하는 것과는 비교할게 못되었다. 억지로 신음을 참고 옆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가 깰까봐 마음 졸이며 맞는 절정은 그야말로 스릴 만점이었다. 나는 마음이 한없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왠지 태양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았다. 위에 올라타 몸을 움직이는 태양의 얼굴은 흥분과 땀으로 얼룩져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있었다. 이 얼굴을 다른 사람이 본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머리가 하얗게 되며 동시에 절정을 맞았다. 이렇게 좋은걸 이제까지 왜 한번도 하지 못했는지 갑자기 한심스러워졌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여운을 즐기듯 우린 긴 키스를 했다. “너무 좋아” “........” “.........이런 기분일 줄 몰랐어..” “너무 좋아하는거 아냐?” “...넌 좋지 않았어?” “물론 좋았어” 태양은 내 몸에서 내려가 옆에 누웠다.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기며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의 기분도 내 기분과 같을까? 무척 궁금해졌다. “이제 같이 자면 안되는 이유 알겠지?” “........뭐 어때..” 내심 기대하고 있던 감정이 밖으로 표출되 버렸다. 말을 하고도 조금 놀라서 태양을 쳐다보니 약간 황당한 눈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건 뭔가 뒤바뀐 듯 했다. 나이가 많아도 내가 더 많고 경험이야 태양에게 비할 바가 못되겠지만 내년이면 성인이 되는 나이다. 내가 저런말을 한다고 이상할건 없다는 거다. “무대포 정신이네” “쳇. 내숭떠는 것 보다는 낫지 않아?” “잘하면 나도 한번 해보자고 덤비겠다” “........못할 것도 없지” 물론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없지만 나도 남자인데 한번쯤은 가능할꺼라고 생각했다. 내 말에 태양의 표정이 굳어지며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키워놓으면 뒤통수 치겠네.. 뭘 믿고 까불어?” “키웠으면 내가 널 키웠지.. 나이도 어린게 사사건건 타고 오른다..” “한영원이 사정 한번에 드디어 도셨구만. 머리 좀 식히고 와라” “뭐 서로 책임을 느껴야 될 사이가 된건 기쁘게 생각해” “책임?” “응...우리사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지”“우리 둘 중 누가 난소를 몸에 품고 있었나? 아니면 너랑 나랑 섹스라도 했어?”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넌 나에게 예의를 지켜야 될 필요가 있어” “책임운운 하지마. 나 책임감 없는거 알잖아” “그럼 지금부터라도 느껴” 사실 가슴이 많이 아팠다. 섹스를 한 사이도 아니면서 책임 운운한 것은 어디까지나 태양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서였지만 그 대답은 가슴 한 구석을 찔러왔다. 더구나 재협에게 들은 말이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떻게 확실히 물어볼 구실이 생각 나지 않았다. 직접 확인한 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태양을 몰아붙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한 걸음 다가갈 때 마다 벽이 생기는 것 같았다.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이해하고 싶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마음을 모두 열지 않는 이상 그건 불가능한 일인 듯 했다. 한때의 불장난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우린 너무나 많이 걸어온게 아닐까? Part 8. sand castle “뭘 만들고 있는거야?” “........모래성” “........거기에 물을 부을거야?” 꼬마는 성 아래쪽 웅덩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니. 여기엔 함정을 만들거야. 내 허락 없이 함부로 이 성에 들어올 수 없어” “바보” “......” “바람을 막을 수 있어?” “........그런 건 막을 필요가 없어” “바람이 불어서 모래를 가져가 버릴 걸” “......” “성은 돌로 만들어야 돼. 돌은 튼튼해서 부서지지 않아” “그냥 돌로는 만들 수 없어. 다듬고 깍아야 쌓을 수 있잖아” “그건 어른들이나 하는 방식이지. 우린 퍼즐같이 끼워 맞춰” “......공사 기간이 꽤 걸리겠다” “부실한 모래성 보다는 나아. 내가 도와줄게 같이 돌을 모으자” “......도와준다구?” “그래. 같이 하면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거야” 나는 꼬마의 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사막이었다. 요즘은 이상하게 아침에 눈을 뜨면 꼭 다른 곳에서 잠을 잔 느낌이 든다. 가령 숲속의 나무 위라던가 강위에 떠 있는 배 위에서라던가 아니면 하늘에 떠 있는 구름 위에서라던가.. 이상한 체험이고 몽롱한 느낌이었다. “세수는 했나?” “........” “꼬락서니 하고는..” “나 아무래도 신 내림을 받는 것 같아” “........세수 좀 하고 온나” “내말 듣고 있는 거야?” “그런건 가까운 다방에서 무당이랑 상의하고 세수나 좀 하라고” “씨. 세수하고 왔어!” “체육시간 끝나고 했나? 땀 냄새가 풀풀 나는구만..” “아....귀찮아“ “드럽게...점심 혼자 먹어라” “....야!!!!!!!!” 식당으로 향하는 문우를 따라가면서 나의 교우 관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았다. 최소한 들어주는 척이라고 해야하는거 아닌가. 친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는데 본능에만 충실하다니 내가 지 앞에서 쓰러져도 남은 밥그릇은 비울 위인이다. “으앗!” 문우를 뒤따르던 발검음이 갑자기 누군가의 손에 제지당하면서 몸이 붕 뜨는가 싶더니 거칠게 돌려세워졌다. “굳세어라 준이야..라도 촬영하는거니? 힘이 삼손 이구나” 그는 살벌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더니 아무말 없이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 아파!!” 침묵은 금이 아니라 고문이었다. 저 괴력은 이미 겪어봐서 잘 아는지라 섣불리 반항은 못하겠고 붙잡힌 팔뚝만 고통을 호소할 뿐이였다. 그리고 저 무시무시한 표정이라니.. 폭풍 전야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생사가 달린 일이라고 생각하니 닭살이 돋기 시작했다. “준아. 잠깐만!” 절규에 가까운 나의 외침에 지나가던 학우들의 시선만이 따갑게 느껴질 뿐 준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반항을 포기한 나를 간단히 학교 주차장으로 데려가더니 정체모를 바이크 앞에 세웠다. 옷은 다 헝클어지고 숨은 거칠어져 있었다. 드디어 니가 돌았구나라는 시선으로 쳐다봐주었다. “눈” 눈 뭐? 아무리 니가 살기를 내뿜어도 이제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 “왜 날 개새끼마냥 끌고 온건데?” “지금부터 말을 아끼는게 좋을거야” 저 협박성 발언은 여전하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설명은 해야할꺼 아냐. 너 때문에 밥도 못 먹고 있잖아” “밥? 니가 지금 끼니걱정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뭐? 어디 야산에 암매장 당할 걱정이라도 해야된다는거야?” “오히려 그게 다행일지도 모르지” 그는 농담과 진담을 확실히 구분하는 편이였다. 지금 그의 눈은 어줍잖은 농담을 하는게 아니란걸 말해주었다. 나는 순간 공포를 느꼈다. 그냥 뒤 돌아서 달리려했다. “한영원. 여기서 죽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말 들어” 목덜미에 닿은 손바닥의 압력은 금방이라도 목을 꺽어버릴 기세였다. 갑자기 목이 아래로 눌리는가 싶더니 머리위에 무언가가 씌워졌다. 헬멧이었다. 너머로 보이는 그는 그제서야 만족했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띄우며 바이크에 올라탔다. 물론 나를 먼저 거칠게 앉히고선.. 눈은 살기를 띄고 있으면서 왜 자기 허리를 움켜쥐게 하는지 모르겠다. 그가 준비해 놓은 무시무시한 이벤트가 어떤 것 인진 잘 모르겠지만 육감이 경고하는 두려움은 자꾸만 현실로 다가왔다. 문득 재협의 말이 떠올랐다. 태양에게 접근하고 준에게 몸 성히 살아남은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했었다. 이제 나도 몸 성치 않은 사람들 중 한명이 되버리는건가.. “놔” 갑작스런 거친 움직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적한 길로 접어드나 싶더니 결국 이런 암매장 당하기 딱 좋은 장소에 도달했다. 나는 헬멧을 쓴 채 바이크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내리란 말 안들려?” “........” 갑자기 다리를 들고 한대 치려는 자세를 잡은 준을 발견하고는 얼른 바이크에서 내렸다. 헬멧을 벗자 시원한 산바람이 느껴졌다. 맙소사 산이라니. 나는 여기 등산하러 온 것도 아니고 소풍 온 것도 아니다. 산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지는 건 식은땀이 내 체온을 빼앗아가는 느낌이었다. “너...여긴 뭐하러 온거야” “겁나?” “.......” “그러게 왜 천륜을 어겨” “........뭐?” “내 이웃의 남자를 탐하지 말라” 태양이가 왜 니 남자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후한이 두려워 100m이상 떨어져 있을 때 말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까처럼 목을 잡고 비틀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황천길이 아닌가. “그 재미있는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뭐..뭐하자는 건데” “아~ 지금부터 말이지..” 준은 입고 있던 교복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다가왔다. 그래. 아무리 내가 불리한 싸움이지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 설마 나를 죽이기까지야 할까. 물론 과거의 일을 따져보면 전혀 현실 가능성이 없는 일도 아니지만... 먼저 주먹을 날려야할지 기다렸다 틈을 노려야할지 무진장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크..크큭..” 기분나쁜 웃음소리에 짜증나는 눈빛으로 쳐다봐 주었다. 도대체 이 산속에서 무슨 생쇼란 말인가.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고민하는 표정이 역력하군..큭” “........” “표정 풀어” 말로 해 말로! 갑자기 뻗어온 손을 무기로 오해했다가 머리카락을 넘겨주자 뒷 걸음 치려던 발을 멈추었다. 도무지 무슨 꿍꿍이 속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긴 왜 끌고온건데” “산책이나 할까하고.” “미쳤어?” “싫으면 혼자 내려가던지” 어딘지도 모르는 산속을 바이크를 타고 30분 이상 왔는데 무슨 재주로 걸어서 내려간단 말인가. 준은 나를 남겨둔 채 산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산길은 우리가 타고 온 바이크로 올라가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그를 따라 산을 올랐다.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서 사고 없이(?) 학교로 돌아가는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5분쯤 올라가자 산의 경사가 끝이 나면서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났다. 그곳엔 파란색 지붕의 별장과 잘 꾸며진 정원과 깨끗해 보이는 연못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에 데려올 생각 이었나보다. 그가 왜 별장 앞의 포장된 도로를 이용하지 않고 뒤에 위치한 울퉁불퉁한 산길로 올라왔는지는 저 주체 못할 사이코 기질을 잘 알기 때문에 굳이 따지지는 않았다. 지금은 저 인간이 왜 나를 여기에 데리고 왔으며 마치 계획이나 되어 있었다는 듯 모든 것이 준비 되어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하기로 했다. “문 닫고 들어와” “......준아... 우리 학교로 돌아가지 안으련?” “(싱긋)닥치고 들어와” 준이 꺼내는 음식을 보면서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아 허기진 배가 애타게 먹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요리를 하고 싶은 욕구가 치솟으면서 눈앞의 음식들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그래. 일단 먹고 나서 기운 차리고 다시 설득하는 거야! “뭐 하려는거야?” “글쎄.. 여러 가지 사 놓긴 했는데...” 대책 없는 인간. 음식 재료들을 펼쳐놓고는 고민하는 모습이 상당히 웃겼다. 보아하니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인간이 일만 벌려놓은 꼴이다. “생식 할꺼냐? 들여다보고 있으면 요리가 저절로 돼?” “이리 와봐” 손가락을 까딱하더니 태양이네 돌돌이에게 하듯 나를 불렀다. “재료는 다 있으니까 뭐든 만들어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학교식당에서 밥먹는게 어때?” “한번만 더 학교 얘기 꺼내면 가만 안둔다” “젠장. 요리를 만든다 쳐. 도대체 왜 내가 여기서 너랑 요리를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낭비해야 되는데?” “먹어야 힘을 내지. 그럼 쫄쫄 굶은 채로 본론에 들어갈까?” “.........무슨 본론?” 준은 내 말에 빙글 웃으며 봉지 안에 남은 음식들을 마저 꺼내기 시작했다. “너 솔직히 말해봐. 무슨 꿍꿍이야?” “질문은 식사를 한 뒤에 하는게 어때?” “그..그건 뭐야?” “.......가지 처음 봐?” 가지? 가지..그래..가지. 저건 가지지.. 나는 순간 그것이 성 고문 도구로 보였다. 준은 재미있는 거라도 발견 한 듯 들고 있던 가지를 빙빙 돌리며 나를 놀리려는 의도가 분명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이거 보니까 갑자기 생각나는 거라도 있어?” “저리 치워” “거참 이상하네. 왜 먹는 음식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는 거지?” “니 작태가 괘씸해서 분을 못 참아 그러는 거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신경 쓰였다. 교복 남방 하나만을 걸치고 거기다 단추까지 풀어놓으니 온몸에서 내 뿜는 성적매력을 더욱 플러스 시켜놓았다. 그가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간에 벌써부터 몸의 긴장감은 계속 나를 불안하게 했다. 아무리 우리가 원수처럼 지낸다 해도 눈에 보이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눈싸움 하던 시선을 거두고 식탁으로 갔다. 대충 재료를 살펴보고 간단하게 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김치와 호박, 돼지고기가 있으니 일단 재료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요리명은?” “........” “부족한거 없지?” “........여기까지 와서 밥이나 먹자는 건 아닐 테고..이거 만들 동안 앞으로의 계획이나 읊어보시죠” “한영원씨랑 대화란 걸 해볼까 해서” “......너랑 나랑? 무슨 주제로?” “나와의 대화가 불필요하다고 느낀다면 여기 있을 이유는 없어” 필요성을 느끼는 건 아니지만 피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지.. “......좋아. 대화하는 건 좋은데 오늘내로 여기서 내려가겠다고 약속해” “약속? 미안하지만 난 약속 따윈 하지 않아” “........그럼 맹세해” “...크큭....순결의 맹세라도 할까?” “.........” “.........대화가 좋게 끝나면 내려가지” 준은 시종일관 얼굴에 미소를 띄우며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남자를 원하는 자에게 내비치는 독면을 감추는 가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준은 결코 나에게 관대하지 않았다. “너 요리사해도 되겠다” “.......그건 너희들의 공통된 접대용 멘트니? 참 많이도 듣는구나” “누가 또 그런 말을 해?” “.........민재협” “그래?” “혹시 밥 먹으면서 말하는 걸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해?” “....아니” “다행이네. 그럼 먹으면서 대화해보자. 먼저 왜 나를 여기에 끌고 왔는지 말해줄래?” “태양이는 이런 맛있는 찌개를 원할 때면 언제든지 먹었겠군” 입으로 가지고 가던 수저를 멈추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저 일상의 평범한 대화처럼 말을 흘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갑자기 입을 열기가 싫어졌다. 식탁에서의 대화는 준의 그 한마디로 끝이 나버렸다. 차라리 침묵이 더 편했다. 식사를 끝내고 시계를 보니 벌써 4시간이나 지나있었다. 수업을 빼먹은 것 보다 내가 없어진걸 알고 태양이 걱정할까봐 더 신경이 쓰였다. 차라리 아까 그냥 큰길로 내려갔으면 지금쯤 운 좋게 지나가던 차라도 얻어 타서 무사히 학교에 도착하지 않았을까라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은 너무나 싫었다. 그가 아니면 나는 이곳을 마음대로 벗어날 자유조차 없는 거다. 곧 어두워질 것 같은데 준은 여유를 부리며 나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책 치우고 빨리 얘기해” 대화 할 생각은 식탁에 두고 왔는지 계속 딴 짓을 하는 준에게 내가 먼저 말했다. “아...다 치운 거야?” 답답한 사람이 해야지 별 수 있니. 니 녀석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시간아 흘러가라하고 있는데 나까지 덩달아 세월아 네월아 할 수는 없잖아. 그의 맞은편 소파에 앉아 피곤한 기색을 내비췄다. “그 짜증나는 표정부터 치워” “피곤해” “설거지 조금 했다고 피곤하시다?” “요리는 누가했는데?” “정말 상황파악 못하는 인간이군. 내가 지금 생각만 조금 바꿔먹으면 니 신변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걸 좀 알아뒀으면 좋겠는데..” “협박 그만해. 도대체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 인거야” “그거야말로 내가 들어본 최고의 멍청한 발언이군” “.......” “말했지? 마음만 먹으면 넌 한입거리도 안돼” “.........그럼 뭐 때문에 참는건데?” “참는다는 건 없어. 난 내 마음가는대로 행동할 뿐이야” “그래. 앞으로도 니 마음대로 할꺼잖아. 난 지금 너의 사고방식을 묻는 게 아냐. 그딴 건 알고 싶지도 않고.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성격도 급하셔라. 누가 쫒아오기라도 해? 시간은 많고 밤은 길어” “너랑 밤을 새어가며 실랑이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내가 너를 5년째 보는데..... 볼 때마다 새로워” “........” “매번 나를 흥분시키지. 그게 애석하게도 악감정이라는 점만 빼면... 그리고 태양이라는 공통분모만 없었다면 우리가 만날 때마다 발톱을 세우는 사이가 아닐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 “.........무슨 말인지..” “넌 노력했잖아. 나랑 잘 지내보려고” “........” “물론 나는 거부했지. 너와 친하게 지낸다는건 물과 기름이 섞이는 거나 마찬가지 였으니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젠 그런 공식이 무의미해졌어. 우리의 공통분모가 자신의 위치를 거부했으니까” 지금 그의 기분이 충분히 안좋을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그도 느꼈을 것이다. 태양은 예전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이제 그도 어떤 결정을 내린 걸까? “태양이 언제 너에게 모든걸 털어놓을진 모르겠지만 내가 한 가지 알려주지. 우리의 민들레 재협군이 너한테 귀뜸은 했다고 하던데.... 천사표 최정희양이 태양의 여자였다는거” “.......뭐?” “크큭.. 세상에 둘도 없는 남매처럼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을 보면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거 같다니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진실만을 말할 것을 맹세라도 했어야했나?” “....본인에게 직접 들은 말이 아니면 믿지 않아” “물론 태양이 입으로도 듣게 될 사실이야. 너한테 거짓말이나 하려고 여기까지 와서 이 짓하는 건 아닌거 알지?” “....하.....” 준이 말한게 모두 사실이라면 그들의 연극은 훌륭했다. 나는 그쪽으로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 물론 의심 할만한 행동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친남매가 아닌 것이 이상하게 보일정도였다. 태양을 믿어보기로 했었다. 그의 진실 된 눈만은 거짓이 아니라 믿고 싶었다. “그런 과거가 있었다는 거야. 그녀는 과거고 나는 태양의 현제지” 목이 말랐던지 준은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고 나에게도 하나 던져 주었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그제서야 정신없이 회전하던 머리가 제자리를 찾는 것 같았다. “정희랑 승권이 사귀는거 알지? 이 시대가 낳은 가장 비극적인 커플이야. 차라리 태양이 정희를 택했다면 그 집안만 콩가루되고 끝나는건데 이젠 이리저리 꼬여버려서 서로가 괴로움에 몸부림 치고 있지” “........” “그럼 넌 뭘까?” “........” “왜 성록이마저 널 인정하는 거지? 한영원이 그렇게 대단한 인간인가? 내 머릿속에 물음표 보여? 니가 오늘 풀어야할 숙제야” “넌 태양이 사랑해?” “.........사랑? 그에 대한 내 마음을 사랑이란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어. 그에게 가지고 있는 애정은 무조건적인 것도 아니고 헌식적인 것도 아냐. 항상 아닐 경우를 대비한 돌파구를 포함한 감정이지” “조건이 많으면 감정적인 부분은 마이너스가 되기 마련이야. 난 지금은... 감정에 충실하고 싶어” “언제는 안 그랬나? 넌 항상 감정에만 충실해왔잖아. 아니면 4년동안 무시당하면서 어떻게 버티고 있었겠어” “내 감정을 함부로 말하지 말아줘. 너에겐 그런 말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난 누구한테든 자격을 부여받고 말하진 않아. 내 말이 기분나쁜가보지?” “.........니 말이 사실이라 해도... 난 태양일 포기할 생각 없어” “포기하라고 한 적도 없어. 다만...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 “나와 섹스해. 여기서 지금.” “........제 정신이야?” “그리고 여길 나가는거야. 후엔 니가 태양이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어” “.........” “말했지만...난 지금 너에게 제안하는거야. 니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에서도 밖에 나가서도 조금 괴로울거야” “........나와 왜 그딴 걸 하자는 거야? 넌 아무나...아니 싫어하는 상대하고 하고 싶어?” “널 싫어하지 않아. 그리고 태양에게 니 순결을 바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태양이 내 첫 상대여야 하는 것에 연연하는게 아니야. 난 너.랑. 하기싫어” 너니까 하기 싫다는 부분에 무진장 악센트를 주면서 말을 했더니 갑자기 준이 살벌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미쳐 피할 틈도 없이 그의 팔 안에 갇히고 말았다. “태양이랑 내가 어떻게 섹스 하는줄 알아?” “........” “소파에서는 이렇게 팔을 돌리고... 뒤에서 올려주지..” “앗!” 두 팔을 잡고 위로 올리더니 옆으로 꺽어 몸이 돌아가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자세가 뒤집어져 그의 가슴이 등에 닿자 알 수 없는 전율이 몸을 타고 흘렀다. 준과 태양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고 팔의 통증이 심해져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다리 벌려봐. 기분 좋게 해줄게” “..아....젠장..” 억지로 무릎을 끼워 넣으려는 걸 거부하자 팔을 더 아프게 꺽었다. 힘을 당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기어코 눈물이 흘러나왔다.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았다. “하하.....미치겠군. 왜 울고 지랄이야” “.........” “참 대단하다. 더했다간 혀 깨물고 자결 하겠군” “......비켜” 얼굴을 대충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그에게서 떨어져 앉았다. 꼭 억울해서가 아니라 그냥 서러워서 눈물이 났다. 더 이상 할 생각이 없어졌는지 준도 떨어져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공간이 매우 답답하게 느껴졌다. 꽤 넓은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숨쉬기조차 답답했다. “....아.......하아..” “왜그래?” “헉!” “한영원!!” 갑작스레 준의 얼굴이 바로 앞에 와닿는듯 싶더니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준의 목소리가 조금씩 멀어져가는 것 같은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감각도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멈춰” “..........꼬마야 왜그래?” “멈추란 말이야” “.....난 바빠” “어딜 가려는거야!” “태양이 나를 불러” “넌 태양을 만날 수 없어. 니가 다가가는 만큼 멀어져 버릴 걸” “무슨 소리야. 이미 가까이...” 분명 조금 앞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태양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디 간거지?” “왜 넌 모르는거지? 그건 환상이야. 니가 만들어낸 신기루야” “....신기루?” 꼬마의 뒤로 모래바람이 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사막이었다. 그것은 반복되는 끔찍한 악몽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울고 웃고.. 죽음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뒤이은 아버지의 죽음은 나를 그것으로 하여금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항상 어떤 만남 뒤에 죽음이란 단어가 필연적으로 따라다녔다. 어쩌면 나는 숨을 곳이 필요해 환상을 만들어내는 건지도 모른다. 꿈에서는 모든 것이 나의 뜻대로 되었고 그곳은 파라다이스였다. 나만의 낙원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방해꾼이 나타났다. 꼬마는 끊임없이 나를 일깨워줬다.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보라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자꾸만 재촉했다. 이젠 꿈을 꾸기가 두려워졌다. “......정신 들어?” 희미했던 형체가 점점 사람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준이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주며 옆을 지키고 있었다. 왜 침대에 누워있고 갑자기 환자가 되어버린 건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설마 젠장할 기절이라도 한건 아니겠지? “도대체 얼마나 부실하길래 기절씩이나 하는 거냐? 하여간 사람 놀래키는데 재주 있다니까” 아아...쪽팔려. 내가 왜 그랬지. 밥 잘 먹고 그딴 걸 왜 한거지.. “몇시야?” 젠장. 목소리는 또 왜이래. 꼭 목구멍을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놓은 느낌이다. “물 좀..” "목소리 예술이네“ 목을 축이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창밖을 보니 벌써 어두어져 있었다. 오늘 내려가기는 다 틀린 것 같았다. “사람이 쓰러졌으면 병원에 데려가야 할꺼아냐..” “.........이봐. 나도 응급상황정도는 판단할 줄 알아. 넌 잠시 정신을 잃은 거잖아” “니가 의사냐?” “흥. 여기서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것도 니 운명 아니겠어?” “그래..넌 살인 방조죄로 감옥에서 썩겠구나” “엄살부리지마.. 태양이 뒤에 숨으려고만 하니까 이렇게 약해지는 거야” “........숨긴 누가 숨어?”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지.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는 니 자신이 더 잘 알잖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원하신다면... 혹시 또 쓰러질건 아니지?” “........쓰러질 때를 알고 쓰러져야 멋있는 거냐?” “빨리 정신 차리고 밥줘. 니 수발드느라고 배고파 죽겠어” “고작 물수건 하나 이마에 얹어준것도 수발이야? 그리고 먹은지 얼마나 됐다고 배가고파?” “...........지금 새벽 1시야” “뭐?” “시계 보여주리?” 그럼 내가 6시간을 넘게 기절해 있었다는건가. 아주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은데 벌써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다니 믿기지 않았다. 밖이 어두워서 저녁 8시쯤 된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방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의 가구와 내가 누워있는 햐얀색의 침대 그리고 한쪽 벽면이 모두 유리로 되어있어 까만 하늘이 보였다. 모든 것이 정적이었고 움직이는건 나와 준밖에 없었다. 멍하게 창밖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준이 옆에 털썩 누웠다. 이 녀석과 한 방에 한 침대에 같이 있는다는게 신기했다. 그리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던 성격은 어디로 갔는지 조금 다른 사람이 되버린 것 같았다. 요 근래 잘 안보이더니 산에 올라가 인격수양이라도 하고 왔나보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는 모습이 굉장히 예뻤다. 어깨까지 닿을 듯한 머리카락도 굉장히 부드러워 보였다. 역시 밤은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뭘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데” 눈을 감은채로 조용히 말하는데 움직이는 입술이 더 붉게 보였다. 아무래도 눈이 미쳐가는게 틀림이 없다. 재빨리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아까 한 제안 말인데” “........” “아직도 생각 없어?” “없어” “.........얼굴 보면서 얘기해야지..” 한손으로 내 머리를 잡아 돌려 얼굴을 마주 댔다. 지나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머리에서 위험신호가 마구 울려댔다. “잘 생각해봐” “......읏” 바로 귀 옆에서 울려대는 소리와 볼에 닿는 부드러운 살의 느낌은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직 잠에 취한 몽롱한 의식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불투명하게 인식되었다. 어느 순간 나는 그와 거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대위에 뒤엉켜 서로를 탐했다. 벌써 내 교복셔츠는 벗겨져있었고 그의 옷도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거의 벗어던지고 있었다. 아! 그가 이렇게 멋진 몸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팔을 뻗어 손으로 쓸어보았다. 단단한 근육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준은 몸을 밀착시키고 가슴에 있던 내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흥분된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서둘러 그의 벨트를 풀고 바지를 내리려했다. “잠깐. 천천히 해” 준의 목소리에 내가 지나치게 흥분하고 서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난 지금 무슨 짓을 하려고 한건가. “이봐. 그만 하자는건 아니야” 도로 옷을 집어 입으려던 내 손을 움켜잡고 밀어버렸다. “.........제발 비켜” “흥분해서 옷 벗길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뭘 그만해” “아..젠장. 우린 둘 다 제정신이 아니야” “여기서 그만두면 진짜 미쳐버릴지도 몰라” 곧바로 입술을 포개고 몸을 더듬어왔다. 손이 닿을 때 마다 그 흥분에 몸이 들썩였다. 생각은 거부하는데 몸은 거부하지 못했다. 정신없이 그의 애무를 받고 있는데 어느 순간 아랫부분에서 엄청난 전율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참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목에서 흘러나왔다. “니 표정이 지금 어떤 줄 알아?” “.....아..하아...” “잡아먹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얼굴이야” “흣” 내 중심을 움켜진 손이 더욱 빨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의 신경이 그곳으로 몰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잡고 흔드는게 아니라 기술적으로 자극해왔다. 어떤 포르노를 보더라도 이렇게까지 자극이 빨리 전달 된 적은 없었다. 준의 신음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동시에 그의 손에 뜨거운 액체를 뿌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음..흐......” “.......하아...힘들어?” “........” “자세 좀 잡자” 무릎에 걸쳐있던 바지를 벗기고 그도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어던졌다. 힘이 빠져 준이 하는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몽롱한 의식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읏..차거!” 갑자기 엉덩이에 와 닿는 차가운 느낌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뭘 바르는거야!” “.........처음인데 윤활제가 없으면 찢어질 수도 있어” “아.......맙소사..” 미끌거리는 느낌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무언가가 몸으로 들어왔다. 조금 일으켰던 몸을 재빨리 뒤로 눕히고 손을 입으로 틀어막았다. 이상한 느낌에 망측한 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헤이. 눈뜨고 다리 올려봐” 살짝 눈을 뜨고 아래쪽을 보자 그의 흥분한 남성이 눈에 들어왔다. 손가락을 넣어도 아픈 것 같은데...... 상상만 해도 아찔했다. 나는 몸을 바로 뒤집고 침대를 벗어나려했다. “이런. 뒤로하고 싶어?” “악! 아파!!” 한손은 허리를 잡고 다른 한손은 머리채를 잡고는 자기 쪽으로 무자비하게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뒤집어져 그의 밑에 깔린 꼴이 되었다. 몸을 바로하려하자 어깨를 잡고 눌러버렸다. “잠깐만. 살살......” “가만히만 있으면 살살할꺼니까 자꾸 성질 돋구지마..” “........으....” “엉덩이 들어야지..” 저런 파렴치한 말을 하면서 배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위로 당겼다. 나는 억지로 그의 손을 잡아빼고 몸을 뒤집었다. 이미 온몸이 진땀으로 축축해져있었다. 준도 힘을 써서 그런지 얼굴과 몸에 땀이 배여 있었다. 약간 화가난듯한 표정으로 내 다리를 양팔로 어깨까지 잡아올렸다. “아악!!!!!” 생전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어떤 폭력에도 이렇게 아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딱 죽을 맛이었다. “아...아학......” “........후....많이 아프냐?” “..........제발...빼..빼..” “숨 크게 들여마셔봐” “......하아....하아...아....” 너무나 좁게만 느껴지는 공간이 그도 고통스러웠는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숨을 크게 내쉬자 고통이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몸을 조금 뒤로 뺐다. 약간 빠져나가는 느낌과 조금씩 들어오는 느낌이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아파서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제발 그만 끝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헉!” 반복되는 고통으로 참지 못할 정도가 되자 갑자기 준의 몸이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나는 숨을 깔딱거리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목을 잡아당겨 완전히 매달려 눈물을 찔끔거리는 내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허리 조금만 들어봐” 준이 베개를 가져다 허리 밑에 넣어주고 몸을 침대에 닿게 하고는 목을 조금 젖혀주었다. 공중에 떠있던 다리를 그의 허리에 감자 그제서야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하아..지금......얼마....하아...나..............참고.......있는 줄 알아?” “아..아핫..” 무슨 말인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고통을 주는 자극이 조금씩 쾌락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으...하읏!” 순간 눈앞에 불꽃이 번쩍 하더니 미칠 것 같은 쾌감이 몸을 전율시켰다. “......여기?” “아학! 거...거기..” “빙고!” 그는 대단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이 흐뭇해하며 그곳을 집중적으로 찔러 올렸다. 그 뒤로 이성을 놓아버리고 본능에만 매달렸다. 그 정도의 쾌감은 그것을 느끼다 죽어도 무르지 못할 정도로 황홀했다. 서로의 들뜬 얼굴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발했다. 그렇게 흥분하고 소리 지르며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무섭다 했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 어떻게 해서든 그의 바이크에 몸을 실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그의 허리에 손을 감는 순간 이미 다른 한 사람의 손을 놓쳐 버렸다. 되돌릴 수 없는 현제를 만들어버렸다. 본능에 충실하자 어떤 것도 장애가 될 순 없었다. 그와 꼬박 3일을 먹고 자고 섹스 했다. 우린 이성이란 걸 집에 두고 온 짐승이었다. 눈만 마주치면 키스하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서로에게 몸을 맡겼다. 어떤 말도 필요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산에서 내려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준이 먼저 나에게 물어보았다. 무서웠다. 산 아래의 세상은 이제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봐 덜컥 겁부터 났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곳에서 이젠 보기만 해도 섹스부터 생각이 나는 이 남자와 함께 있을 수는 없었다. 샤워를 끝낸 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목요일에 올라왔으니 오늘은 토요일이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탈해졌다. 한 순간의 불장난으로 전부를 잃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우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버린 것 같은데 준은 처음 나를 데리고 올 때와 별로 변함이 없는 것 같았다. 그에게 나와의 섹스는 무슨 의미였을까? 단순히 내가 태양에게 매달리는 꼴이 보기 싫어 벌을 줄 생각이었나?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다 왔어” 별장에서 멀어질수록 생각이 많아지더니 이젠 머리가 복잡해져 터질 것만 같았다. 어느새 집 앞까지 왔나보다. 어두운 나의 집이 눈에 들어왔다. “한영원” “.........” “너 나랑 별장에서 나올 때부터 그 재수 없는 표정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못봐주겠다” “.........” “씨발 그렇게 걱정되면 내가 약이라도 처먹여서 니 의지와는 상관없이 당했다고 해”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인지 몰라? 지금 양심의 가책 느낀다고 그 지랄하는거 아냐?” “왜 화를 내고 난리야?” 머리가 복잡한건 사실이지만 이 모든 걸 누구의 잘못이라고 탓할 생각은 없다. 결국 내가 선택하고 내가 저지른 일이다. 후회가 드는 건 당연하고 표정이 좋지 못한것도 당연한거다. 준이 화를 내면서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너 때문에 그러는거 아니니까 신경쓰지마. 나 들어갈게”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팔을 잡고 돌려세워 벽으로 밀어붙였다. “여기서 니탓 내탓 하는건 우습지. 깨끗이 끝내자. 서로 즐거웠잖아. 안 그래?” “...................그래..” “.........들어가” 한참동안 뜸을 들이다 준은 바이크를 타고 사라졌다. 그는 이제 눈앞에 없는데 아직까지 체취가 남아있는 것 같았다. 언제가 태양에게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 처음은 고작 유혹하나 뿌리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줘버렸다. 나는 나의 태양을 배신했다. 믿음 하나 지키지 못하고 그의 진실을 오해했으며 그의 마음을 기만했다. 나는 사랑할 자격을 상실했다. Part 9. lose 언제나 불행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찰나조차 허용되지 않으며 감히 거스를 수도 없다. 어짜피 맞아야 할 운명이라면.. 개척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나는 무엇 때문에 소망하는 걸까. “많이 늦었네” 준이 가버린 후 혼자 집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는데 낮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날 힘 조차 없었다. “설마 했는데.. 같이 있었군” “.......” “태양이가 너 있을 만한 곳은 다 찾아보던데... 어디 숨어 있었던 거야?”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말 같았지만 목소리는 더 이상 낮을 수 없게 깔려 있었다. 일어나서 얼굴을 들고 성록과 눈을 마주쳤다. 표정 없는 얼굴은 지금 그의 심정이 어떤지 나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벙어리가 된거냐?” “........” “여러 사람 뒤통수 시원하게 때리고 나니 기분 좋디?” “.....왜...왜이래..” 목을 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이미 반항 할 힘 같은 건 없었다. 살기등등한 그의 눈을 마주하려니 온몸의 기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니가 이런 녀석인줄 알았으면 좀 다른 대우를 해줬을텐데..” “.........놔..” “이봐. 다른건 몰라도 이런식으로 날 기만하는건 참을 수 없어. 그건 태양이도 마찬가지일텐데.. 어떻게 뒷감당을 하시려고?” “........그런 적 없어” “그래? 그럼 아무 일 없었어?” “.........그냥.....그냥 섹스였어” “.........” “그건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었어. 단지 섹스일 뿐이야. 그리고 내가 왜 너한테 변명을 해야되지? 이런 변명을 들어야 할 사람은 태.!!!” 순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엄청난 충격이 왼쪽 머리를 강타했다. 얼굴을 이런 식으로 무지막지하게 맞아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한동안 통증이 계속되어 반쯤 몸이 숙여진 자세로 일어 날 수가 없었다. “사랑과 섹스는 별개인가? 한영원이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그 따위 변명 같지도 않은 말 들으려고 여기서 죽치고 있었는 줄 알아?” “.........” “니가 좀 더 신중하고 사려 깊은 녀석이길 바랬어. 이제 보니 내가 가당찮은 착각에 빠져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이라고 알았으니 다행이지.... 먼저 등을 돌린 건 너야” 성록은 더 이상 차가울 수 없는 목소리로 나를 힐난하고 등을 돌렸다. 보이진 않았지만 느낄 수 있었던 그의 감정을 한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렸다. 왜 하필 준이였을까. 그는 태양의 특별한 상대였고 성록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왜 나에게 손을 뻗어 이런 참극을 만든걸까. 더 이상 생각하기를 거부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어두운 집안에 들어가 그대로 잠을 청했다. 오늘이 빨리 지나가기를.. 자고 일어나면 모두 꿈이었기를.. 눈꺼풀이 이상할 정도로 무거웠다. 눈으로 들어오는 빛이 감지되긴 하는데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손을 들어 비벼보았다. 따끔따끔한 느낌과 이물질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어젯밤 잠깐 울었던 것 때문에 얼굴이 엉망인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나는 3일동안 학교를 무단 결석했다. “눈 떴으면 일어나 앉아라”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안 떠지는 눈을 억지로 떴다. 문우가 살벌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어..언제 왔어?” “..........내가 물어야 할 말인 것 같은데..” “........” “..............니 살기 싫나?” “........” “3일동안 어디서 무슨 지랄을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한 가지만 묻자. 내가 니한테 뭔데?” “.........” “죄 지은거 있나? 왜 고개를 못 드는데?” “.......미안해” “미안? 뭐가? 친구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게 미안하나?” “......사정이 있어서.........연락 못했어” “니 사정 따위는 이제 듣고 싶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다. 학교에는 아프다고 해놨으니까 그런 줄 알아라. 이제부터 졸업을 하든 지랄하다 퇴학을 맞든 자퇴를 하든 니 마음대로 하고 우리 사이도 여기서 끝내자. 한번만 더 이런 일 있으면 내가 돌아버릴 것 같으니까.... 더 이상 못하겠다” 마지막에는 거의 쥐어짜듯 말하는 문우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힘든데..너무 힘든데 이제 친구마저 등을 돌리려한다. “간다” “.......문우야 가지마” 방문을 열던 문우가 거의 흐느끼는 내 목소리에 멈췄다. 눈물로 호소하면 나를 봐줄까. 그는 언제나 나를 챙겨줬는데 이렇게 힘들 때 그가 없으면 나는 정말 아플 것 같았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가지마. 문 열지마..” 눈앞이 흐려지면서 문손잡이를 잡고 망설이다 한숨을 쉬며 방문을 닫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었다. 내가 붙잡으면 그는 떠나지 못할거라는걸 알고 있었다. 이젠 내 자신이 싫어서 눈물이 나왔다. 한번 쏟아지기 시작하자 멈출 수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휴지로 닦아 주었다. 미안함과 민망함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만 울고 씻어라. 나가서 밥이라도 먹자” 힘이 빠져버려 무거운 몸을 문우가 이끄는데로 일으켰다. 발을 바닥에 놓고 체중을 실으니 허리부분에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순간 멈칫하다가 슬쩍 문우의 눈치를 봤는데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얼룩져 있는 얼굴을 훔치고 억지로 표정관리하며 욕실로 들어갔다. “얼굴은 어떤 씹새끼가 그 꼴로 만들어 놨는데?” 물을 받으면서 거울을 보니 왼쪽 관자놀이부터 귀 옆까지 선명하게 멍 자국이 만들어져 있었다. 정말 아프게 맞았다 싶었더니 결국 스마트한(?) 내 얼굴에 오점이 생겨버렸다. 이 꼴로 어떻게 나간담.. “눈은 부어터지고 멍하나 장식으로 달고 폼은 뭐 마려운 똥개처럼 해가지고 잘한다” 그렇게 적나라하게 설명 안해줘도 지금 내 상태가 어떤지 잘 아니까 성질 좀 죽여주라. 지은 죄가 있기에 입도 뻥긋 못하고 조용히 씻는데만 열중했다. 옷을 갈아입고 머리엔 모자하나를 눌러쓰고는 문우와 함께 나왔다. 어제 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더니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현기증이 이는 것 같았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도 많았다. 모두들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우울한 내 표정은 그 속에서 이방인이 된 느낌이었다. “한식 먹자” 문우는 깔끔한 식당이 보이자 바로 들어갔다. 걷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나를 위한 배려가 느껴졌다. 그는 항상 나를 먼저 생각해줬다. “.....오늘 검도부 연습 없어?” 그가 일요일엔 학교에서 검도부 연습이 끝난 뒤에나 집에 들렸었기 때문에 생각이 나서 물었다. “몇일전에 아 하나 입원시키고 근신이다” “.....입원?” “깝죽대길래 죽도를 좀 썼지” “..........언제?” “글쎄..금요일인가” 물잔을 돌리며 남의 일 얘기하듯 흘렸다. 검도를 하는 놈이 죽도로 폭력을 휘둘렀으면 말 다했다. “애를 입원시켰는데 겨우 검도부 근신이야? 학교에선 그냥 놔둬?” “왜? 정학이라도 맞았으면 좋겠나” “나 몰래 숨겨둔 빽이라도 있었어? 걱정되니까 그러잖아” “니 걱정이나 해라. 담임한테 아프다고는 했는데 곧이곧대로 다 믿을거 같나?” “.........진짜 아프잖아..” “상이라도 줄까?” “.........” “입 다물고 밥이나 먹어라” 한숨 섞인 문우의 말에 앞에 놓인 비빔밥을 먹기 시작했다. 지난 일을 묻지 않는 그가 고마웠다. 비어버린 옆자리를 채워줘서 고마웠다. 부족한 나를..... 많이 좋아해줘서 고마웠다. [문우]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더위는 고역이였다. 특히나 무거운 호구와 호면은 익숙해 졌음에도 무척 갑갑하게 느껴졌다. 격한 동작에도 흐트러짐없이 예법을 지켜야하며 품위를 유지해야하는데 지금의 내 심리상태로는 정신을 가다듬기가 힘들었다. 다시 정좌를 하고 상념을 없애려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깊이만 더해갔다. “이문우” “네” “따라와” 후배들의 자세를 교정해주던 건우 선배가 나를 불렀다. 선배는 근신이 풀리고 이틀이 지났지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평소에 나를 대하던 모습을 떠올려볼 때 단단히 화가난게 분명했다. “문 닫아” 창고로 들어온 선배가 의자를 당기며 말했다. “너는 검도를 왜 하지?” “.......” “니가 배운건 검의 도리나 이치 따위는 무시한 검도였나?” “.........아닙니다” “죽도도 검이다. 넌 사람을 칼로 내려 친거나 마찬가지야. 도를 무시하는 너 같은 인간은 검도를 할 자격이 없어” “........죄송합니다” “사람 죽이고 미안하면 다군. 내가 널 잘못 본건가? 과대평가 한거야?” 조용조용히 말은 했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였다. “요즘 정신산만한거 눈에 다 보인다. 누가 널 그렇게 흔들어?” “........” “영원이가 요 근래 안보이던데.. 무슨 일 있는건가?” “아닙니다” “.....그럼 태수는 왜 저러는데? 저게 지금 검도를 하는건지 굿을 하는건지 분간이 되냐? 멍하니 있을 때는 꼭 신들린 인간 같아. 니가 좀 챙겨야되는거 아니야?” 나에 대해서 선배만큼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이런 곤란한 질문들을 할 땐 부딪치기 싫은 것도 사실이다.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나조차도 확실하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도 우습게 느껴졌다. 이제 대학입시가 코앞이고 일일이 신경 쓰기도 버거운데 검도부를 책임지고 있는 2학년 둘이 정신 못차리고 있으니 선배입장에서 당연히 답답했을 거다. 잠시 잊고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선배님.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신경 쓰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내가 끼어들 문제는 아니지만.... 니가 영원이보다 태수한테 더 신경써줬으면 좋겠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 있고 눈에 보이니까 이만저만 신경쓰이는게 아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네” “그래. 오늘 애들 해산시키고 너도 일찍 들어가 쉬어라. 내일 3학년들 다 모이기로 했으니까 그때보자” “들어가십시오” 언제부터인가 나 자신을 컨트롤하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빛이나는 검은 머리카락를 본 순간인지 투명하고 슬퍼 보이는 두 눈을 본 순간인지는 정확히 기억이나지 않는다. 그가 나에게 던진 건 시선이 아니라 슬픔이었고 갈망이었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아마 나는 새 학년의 설레임과 흥분으로 지나친 관심을 가졌던건지도 모른다. 반장이라는 학급내의 직책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우들의 추천에 의해 엉겁결에 맡게 되었다. 이런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격도 아니었지만 하기 싫다고 빼는 성격도 아니었기 때문에 투표에 따르기로 했다. 그다지 튀는 외모는 아니었던 그는 자리도 중간에 그럭저럭 평범한 모습으로 1학년 4반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자주 시선이 갔는데 의외로 눈치가 빨라 몇 번 던진 시선을 알아차리고 곧 응수해왔다. 내가 자신을 경계라도 하는 줄 알았나보다. 당당한 눈빛으로 ‘뭘봐’라는 무언의 비꼼을 던지던 그는 재미없어졌는지 어느 순간부터 나를 무시했다. 물론 자존심에 금이 갔다. 시선을 주는 것도 지겨워졌다. “한영원” 쉬는 시간 엎드려있던 그에게 첫마디를 건네자 졸린 눈을 하고 나를 올려다봤다. 한손으로 눈을 비비며 찡그리던 얼굴이 순간 너무 귀엽게 보여(그다지 귀여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에 손을 얹고 헝클어버렸다. “안 치워?” 처음 듣는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남자다웠다. 자고 일어난 목소리라 가라앉아 있었다는건 나중에 안 사실이고 어쨌든 첫마디가 그리 고운 편은 아니었다. “뭔데 반장. 볼일 있어서 깨운거 아냐?” “반장인줄은 아네” “누굴 바보로 아나..” “......담임 호출이 있어서. 단잠 깨워서 화났나?” “당연하지. 난 잘 때 깨우는거 젤 싫어해” 정말 싫어 죽겠다는 표정을 팍팍 내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난 영원은 시계를 한번 쓱 보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의 시선이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느껴져 혼자 즐거워하고 있을 때였다. “이봐” “.........” “교무실이 어딘데?” 조금 황당한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나를 쳐다보고 있던 이유가 교무실이 어딘지 가르쳐달라는 건지는 몰랐을 뿐더러 모르면 말로 묻던지 왜 알아먹지도 못하게 눈빛을 보내는지 엉뚱한 그의 행동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담임 얼굴은 아나?” “.........너 나 놀리는 거지? 담임이 부른다는 것도 뻥이지?” 게다가 유치하기까지.. “내가 니 놀리면서 시간 낭비할 사람으로 보이나? 꿈도 야무지네” “...........시비냐?” “따라온나” 앞서 나가자 뒤에서 궁시렁대더니 곧 따라 나왔다. 그는 특별할 것 없었지만 뭔가 특별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많은 군중 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그의 첫인상이 나에게 가져온 파장은 상당히 컸다. 담임이 그를 부른 건 그가 생활보호 대상자였기 때문이었다. 고아였고 한살이 많았다. 그의 눈에 담겨있는 슬픔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너 어디 살다가 왔어?” “왜?” “그 사투리 말이야.. 굉장히 튀는거 알지?” “근데?”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말하는게 항상 시비조잖아” “내가 누누이 말했제? 니한테 시비걸만큼 한가한 사람 아니라고” “인간이 왜 그렇게 쌀쌀맞냐? 유독 나한테만 더 그런다..” 영원에게 더 투박스럽게 군다는거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대구에는 잠시 있었던 거지만 말투가 배어버려 고치기도 힘들고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성도 못느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복잡한 마음을 숨기고 대하려니 당연히 평소보다 더 무뚝뚝하게 보였을꺼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이미 무엇엔가 관심이 모두 팔려 다른 것들은 거의 무시해버렸다. 가끔씩 던지는 말에도 무성의하게 답했고 학교 수업에도 무관심했다. 왜 처음부터 보지 못했을까. 그의 눈 속에 잠식된 태양을.. 처음에는 나 자신도 한심할 정도로 유치하게 굴었다. 심술이 난 것도 사실이고 그의 태도가 못마땅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꽤 높이 살만한 인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바닥을 보였다. 땅에 눞히고 등을 타고 올라 팔을 꺽어 잡았을 때는 마치 오랜시간 걸려 월척을 낚은 기분이었다. 얕잡아보고 틈을 보였다면 분명 전세가 역전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분한지 고양이처럼 치켜뜬 눈이 가슴 한구석을 쿡쿡 찔러대는 것 같았다. 겪을수록 정이가는 녀석이었다. 검도부 연습이 끝나고 샤워를 하러 가는 길이었다. 늦은 시간이라 주변이 조용했는데 어디선가 낮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잖아..” “무슨 말인데?” “너 기다리고 있었어. 아까 쉬는 시간에 말했잖아” “비킬래?” “태양아. 나 배고프단 말이야” “집에가서 밥먹어” “너랑 먹으면 소화도 잘되고 맛도 두 배로 좋아. 인심 좀 써라~” “좋은 말로 할 때 놔” 기분나쁜 일이 있는지 아니면 원래 저런 인간인지는 몰라도 살벌한 표정으로 영원의 부탁을(거의 애원처럼 보였지만) 차갑게 거절하는 그는 꽤 유명인사였다. 그리고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의 영혼을 가져간 태양이었다. 왜 너는 지금도 충분히 힘들텐데 굳이 가시밭길을 택하는걸까. 그의 태양은 자상하게 보이지도 않았고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내 눈에는 불행해 보였다.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우울한 표정으로 한참을 그 자리에 쭈구리고 앉아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팔을 잡고 조금 거칠게 일으켜 세우자 놀란 눈으로 나를 본다. “문우야..” “집에 안가나?” “......으..응....가야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아.....그냥.....” “.......교실에서 좀만 기다려라. 같이 가자”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껴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팔을 잡고 이끌었다. 제발 내 앞에서 그런 표정하지마라. 힘든 길을 택했으면 당당해져라. 아프면 기대고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라. 좌절하지 말고 자신을 믿어라. 만일 검도를 하지 않았다면 내 자신도 놀랄만한 인내심을 환경에 관계없이 늘 유지하지는 못했을꺼다. 매번 친구임을 일깨워주는 그의 행동에 순간적으로 손이 먼저 뻗어나가려고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위험수위가 지나치게 높아지자 내가 가지고 있는 인내심을 총 동원하여 한계를 극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참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한 가지는 참지 못하면 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 같았고 또 한 가지는 영원을 잃을까 두려워서였다.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곁에 있고 싶은 심정을 알면 그가 어떤 표정을 지을까.............궁금하지도 보고 싶지도 않았다. 영원은 그날 점심시간 이후 행방이 묘연해져 종적을 알 수 없었다. 목격한 아이들의 말로는 전교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휘준’이란 녀석이 무작정 끌고 나갔다고 했다.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소문만으로도 짐작이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주변 인물만 봐도 내겐 그다지 유쾌한 인물이 아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학교 주변을 모두 뒤졌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영원의 집 앞에서 밤을 꼬박 세웠고 그의 태양을 만났다. “집에도 없나본데” 발기척에 시선을 주니 영원의 태양과 그의 친구가 서있었다. 사복 차림의 그들은 외모를 평가하기엔 부담스러운 모습이었다. 내 눈에도 충분히 버거워 보이는 상대였다. “나 알지? 식당에서 한번 마주쳤잖아” “아........영원이 아는 인간” “........그땐 그렇게 말했었지..” 내 비꼼에 태연하게 대답해왔다.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걸 니한테 설명해야 되나?” 계속 되는 내 시비조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인물이고 어떤 실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쉽게 굽실거릴 정도로 나약하진 않았다. “영원이 데리고간게 누군지 알제? 수소문은 다 해보고 여기 온 거가?” “.........끌려갔다고 생각하나보지?” “뭐?” “원해서 갔겠지” “......그럼 왜 다른 사람 눈에는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겠노” “낸들 알아. 둘이 쑈 한건지도 모르지” 참지 못하고 주먹이 나갔다. 빌어먹을 면상을 뭉게주고 싶었다. 운동신경이라면 자신 있었지만 지나친 흥분으로 경솔했다. 복부쪽에 정확히 꽂아내리는 주먹에 상체가 꺽이고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태양아. 그만해” 얼굴로 구둣발이 날아오는 걸 느끼고 눈을 감았는데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난 뒤 발길을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치게 조용한 골목에서 허탈감을 느끼고 주저앉았다. 영원아. 너의 태양은 너에 대한 믿음 따위는 없는 것 같구나. 단지 자존심에 금이 갔겠지. 그래서 분한 거겠지. 용서가 안 되는 거겠지. 나의 마음은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3일후 영원을 마주했을 때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동정심이 생겼다. 그가 들으면 당연히 기분 나쁘겠지만 가여워 보이는 모습에 한없는 연민을 느꼈다. 가질 수 없다면 행복한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데 눈에 보이는 건 슬픔과 절망 또 그것에 좌절하는 내 모습이었다. 너무 힘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희생만 있다면 그건 상실이다. “선배가 뭐래?” 샤워를 막 끝내고 나오자 태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앞으로 잘하란다” “..........끝이야?” “그냥 들고 패던지하지 좀 찝찝하네” “건우선배가 함부로 주먹 쓰는 사람이냐? 더군다나 너한테..”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였다. 이미 그는 나에게 선을 보여줬고 뛰어 넘어주었다. 바램을 내비추진 않았지만 원하는걸 알고 있었고 모른척하기도 받아들이기도 무척 힘들었다. 지난 반년 간 그 부분에 대해 서로 함구했다. 나는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집에 갈꺼야?” “응” “.........그래. 잘가라” 가방까지 챙겨와 놓고는 그냥 두고 뒤돌아섰다. 우리사이가 언제부터 왜 이렇게 됐는지 무엇을 원망해야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이젠 친구라는 감정보다 다른 복잡한 감정이 먼저 느껴지는 태수였다. 건우선배의 말처럼 알고 있는 이상 신경쓰이는게 당연했다. “태수야” 탈의실을 나가려던 그가 멈춰 섰다. 교복남방을 대충 걸치고 서둘러 다가가 손을 잡았다. 조금 놀란 듯 하더니 별 말없이 잡아끄는대로 따라왔다. “밖에 나오니까 좀 시원하네. 팥빙수 먹고 갈까?” “........” “왜? 싫나?” “.......너.......내가 불쌍해 보이냐?” “.........무슨 말인데?” “그렇잖아. 병신 같지 않냐? 고백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사과도 못하고 용기도 없잖아. 한심하고 불쌍해서 속으로 비웃는거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언제 니를 그런 취급하드나?” “넌 말을 안 하잖아. 지금 내 속이 어떨 것 같아? 나는 니가 손만 잡아도!!........” 말을 멈춘 태수는 고개를 숙이고 숨을 몰아쉬었다. 억지로 빼내려는 손을 놓아주지 않자 조금 충혈된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래......알고 있으니까 .........” 알고 있으니까 조금만 참아라? 알고 있는데 모른척 해서 미안하다? 위안을 주는 말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도 확실하지 않은 감정은 말하지 않을거다. 태수에게 약속을 어겨 상처를 주는 일 따윈 절대 하지 않을거다. “기다려 달라는 말은 못하겠다” “........” “이해해달라는 말도 안할께” “........” “지금 그 자리에 서서 조금만 지켜봐줬으면 좋겠다. 길은 보이는데 방향을 정하기가 힘들다. 그래줄 수 있제?” “........지금도 힘들어.....” “............” “.........하지만 니 말대로 할께. 이제까지 항상 니가 날 기다려줬잖아” 젖어있는 눈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머리를 끌어당겨 어깨를 안아주었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한번의 행동이 더 나을 때인 것 같았다. 그에 대한 내 따뜻한 마음이 전달되도록 꼭 안아주었다. 표현하지 않는 건 사랑이 아니다. Part 10. resume 말할 수 없는 진심은 결코 전해지지 않았다. 실수라고 변명해. 미안하다고 무릎 꿇어. 이미 마음속으로 수천 번은 더 말했던 진심이었다. ‘너를 잃으면’ 이란 가정을 해보았다. 내겐 남는 게 없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시간이 해결해줄까? 그러한들 너에게 용서받지 못하면 무슨 소용일까. 보고 싶었다. 두달을 얼굴 한번 보지 못했을때도 이렇게 보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두 다리가 묶여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너는...결코 나에게 달려와주지 않겠지.. “왜 이렇게 늦어?” 들려오는 목소리를 의심했다.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되잖아. “빨리 문 열어” “........돌아가” “문전박대하냐?” “늦었잖아” “그래서 자고 가려고” “.........” “배고파서 이것도 사왔어” 가로등 불빛을 피해있던 그가 봉지를 들고 밝은 곳으로 나오자 나는 놀라서 입을 벌렸다. 얼굴 곳곳에 상처가 있었고 서 있는 자세도 바르지 않았다. 몸이 많이 아파보였다. “보이지? 나 환자니까 빨리 문 열어” 왜 그래. 누가 그랬는데.. 열쇠가 잘 들어가지 않아 손이 헛돌았다. “줘봐” 떨리는 내 손을 잡고 준이 문을 열었다. 움직일때마다 인상을 쓰는 모습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서 있자 팔목을 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이런 비좁은 집에서 어떻게 사는거야?” 술과 안주가 든 봉지를 내게 넘기며 투덜거렸다. “잘 지냈어?” 그는 멀리 떨어져있던 친구가 안부를 묻듯 입 꼬리를 조금 올리며 말했다. 나는 봉지를 든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었다. “그거 여기에 풀어봐. 고사 지내려고 사온거 아니니까” “......얼굴이 왜 그래” “.......일단 앉아” 준이 권하는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준이 반쯤 내린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마주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웃었다. “웃지마. 보기흉해” “하하. 그런 모욕적인 말은 처음 들어” “사실이야” “.....거짓말 하지 마. 보고만 있어도 키스하고 싶지?” 원색적인 농담은 지금 상황에 별로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술은 왜 사온거야. 취해서 그날처럼 뒹굴고 싶은 마음 없으니까 그만 집에가” “자고 갈꺼라고 했잖아. 자꾸 가라고하면 덮쳐버린다” “.....그 몸으로?” “내 실력 알잖아” “......그렇게 대단한 실력이면서 꼴은 왜 그 모양인데?” “.........가끔씩 변화를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이렇게 떡이 되는 것도 새로운 느낌인데” “....미친놈” “크큭... 딴 사람이었으면 그 말하고 일분내로 죽었어” 날아올 주먹쯤은 각오하고 한말이었다. 누구든 날 때려줬으면 좋겠다. 준이처럼 실컷 맞고 나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서방님 목마르다. 물 좀 가져와” “뭐?” “목마르다고” “......그딴 말 지껄이지마. 장난할 기분 아냐” “...........널 가진건 나잖아. 한영원을 차지한건 나라구” “너 도대체 진심이 뭐야? 나한테 왜 이러는건데” 정말 진지한 표정으로 준 앞으로 자리를 옮기며 말했다. 태양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려는 의도였다면 목적달성을 한거나 마찬가지다. 더 이상 나에게 이럴 이유가 없었다. “너랑 있으면 편해” “.......도대체 언제부터?” 눈만 마주쳐도 으르렁거린게 어제 같은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몸의 상처는 별로 아프지 않은지 아까부터 계속 빙글거리는데 뒤통수를 한대 쳐버리고 싶었다. “글쎄... 아마 몇일 안됐지” “너 머리가 어떻게 된거아냐? 혹시 내가 태양이로 보이니?” “설마.... 태양이가 들으면 엄청 기분나빠하겠네. 너 못생긴 영원이 맞아” 정색을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내 말을 농담으로 넘겨버렸다. 갑자기 목이 말라와 봉지에 들어있던 맥주캔을 따서 들이켰다. “야야. 열 받아도 천천히 마셔. 술도 못마시는게..” “........진짜 미치겠다” “내 앞에서 미치진 말아줘” “.......” “안주 좀 만들어와. 집 주인이 뭐 이러냐” 앞에 내밀어진 물체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더니 준이 갑자기 윙크를 하는게 아닌가! 그대로 굳어버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아는 그는 절대 감정어필을 저 따위로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예쁘다는 말만 들어도 폭주하고 얼굴은 언제나 차가웠다. 그리고 난 그가 전혀 편하지 않았다. “우리 영원이 요리실력 다시 한번 볼까?” “입닥쳐” “말이 상당히 거칠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또 괴로워졌다. 나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다. “............난.......난 이제 태양이 어떻게 다시 봐” “........” “힘들어. 진짜 힘들어. 이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단 말이야..” 태양의 얼굴이 떠오르자 걷잡을 수 없이 뜨거운 감정들이 밀려왔다. 이미 얼굴은 울상이 되어버렸고 심장은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내 앞에서 그딴 표정 짓지마. 불쾌하니까” “.........” “4년동안 니 순애보 잘 감상했어. 이젠 아주 지긋지긋해. 니가 먼저 지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어.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려버렸지. 난 태양일 잘 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너에게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라 생각했지. 하지만 몇일전에 깨달았어. 넌 처음부터 태양일 흔들고 있었던 거야. 왜 그때 너의 눈을 보지 못했을까” 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분명 고백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큰 충격으로 다가와 숨을 쉴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날의 섹스는 한 때의 불장난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식으로 감정을 옭아맬줄 알았다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피했어야했다. 안된다. 난 더 이상 그에게 죄를 지을 수 없었다. “그날의 끌림은 분명히 충동적이었어. 너도 인정했잖아”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이미 내 감정의 계기가 되었는데 상관없어지진 않잖아” “무슨 계기? 넌 태양일 좋아하잖아” “지금도 태양이 좋아해. 물론 날 떡이되도록 패던 순간까지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감정의 성격이 조금 달라지긴 했지만 분명 좋아하고 있어. 그는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난 태양이 좋아해. 아니 사랑해” “그것도 알고 있어. 한영원은 최태양을 신주단지 모시 듯 하잖아” “그런데 왜 이래. 날 왜 이렇게 괴롭히는거야” “괴롭혀? 웃기는군. 괴롭히는건 내가 아니라 태양이 아니야? 사랑이라는 구실로 그는 괴롭히고 넌 항상 덮어줬잖아. 나와 몸을 섞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면 아주 멍청한 짓이야. 태양인 니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난잡한 육체관계를 가져온 녀석이니까. 나 또한 처음엔 상처를 좀 받아지. 그가 정신적으로 힘들 때고 마음을 바로 잡지 못해 방황하는거라 이해하려했어. 하지만 중요한건 나는 그를 붙잡아주지 못했다는거야. 지금은 더 멀어졌지만 내가 그의 전부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 허무하고 허무했어. 그 다음은 뭔줄 알아?” “.........” “그냥 서로에 대한 욕구충족 밖에는 남는 감정이 없어졌어. 차라리 동정심이나 측은한 감정만 더 생겼다고 해야할까.. 아무튼 그래. 태양일 좋아하지만 그건 사랑이 아냐” 그가 태양일 많이 좋아하고 그래서 내가 가까이 있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거라 생각했다. 어짜피 대화란걸 해본적이 없는 상대였고 나에게 악감정만을 가지고 있는 녀석인줄 알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걸까. 준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예전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진심이 이렇게 가까이 전해지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너만 힘든게 아니야. 나도 충분히 곤란하고 힘들어. 그때... 너를 집에 데려다 줬을때도 말했지만 깨끗이 끝내고 싶었다. 지금까지 누구와 섹스를 했어도 그 후에 일말의 책임감조차 느낀적 없었어. 그런데 내가 왜 여길 달려왔지? 니가 왜 자꾸 눈앞에 밟히는 건데?” 준의 손이 얼굴로 다가와 쓰다듬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 니가 눈물겨워 미치겠다. 안타까운 우리가 눈물겨워 미치겠다. “울지마” “.....나와.....자꾸 나와....”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 더 흉하다” 그의 농담에도 눈물이 나왔다.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뒷머리로 감겨오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쾅’ 문이 부숴지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다 충격으로 심장이 멎을 뻔 했다. 한번도 본적이 없는 얼굴을 하고 나의 태양이 그곳에 서있었다. 믿을 수 없다는 그의 표정은 일그러져있었고 눈물로 얼룩진 나의 얼굴도 일그러지고 있었다. 순식간에 다가온 태양은 내 머리채를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준을 패기 시작했다. 아직 몸이 성치 않았던 준은 무자비한 폭력에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맞고 있었다. 광기어린 태양의 눈에 공포를 느끼고 움직일 수 없던 나는 서둘러 그의 허리를 잡았다. “그만해! 그만해!” 내 힘에 조금 끌려오던 태양은 잠시 멈추는 듯 하더니 이번엔 나를 때렸다. 주저앉아 그의 발길질을 받아내면서 낮은 신음을 뱉어냈다. 아팠다. 그의 상처받은 눈만큼 나의 육체는 고통을 호소했다. ‘쨍그랑’ 유리조각이 바로 옆까지 흩어지고 태양은 폭력을 멈추었다. 이마를 부딪쳐 찢어진 상처에서 질퍽하게 느껴지는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씨발.....최태양. 그만해” 준이 던졌을거라 추정되는 화병이 산산조각나고 태양은 그의 목소리에 뒤돌아섰다. 하얀 남방은 내 것인지 준의 것인지 모를 피로 물들어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아무리..... 화가나도....... 사람 말은 들어봐야지..으윽..젠장” 힘겹게 말을 잇던 준은 옆구리를 움켜쥐고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가슴을 여러 번 차여 숨쉬기가 힘들었고 찢어진 이마가 고통을 호소했다. 태양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침묵이 길어지자 못견디게 답답해졌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다 죽여버릴까” 나를 내려다보던 그는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던졌다. 정말 소름끼치는 목소리였다. 바닥을 짚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응? 한영원.... 말해봐” “.........” “날 배신하고 엿 먹이고 우습게 보는데.... 널 어떻게 해줄까” “........” “지금 당장 너랑 저 새끼 여기 묶어두고 싹 다 불질러버리고 싶은 심정이거든. 말 잘해봐. 어떻게 해줄까?” “.......안돼.....내가 잘못했어...그러니까..” 울먹임과 함께 목소리가 제대로 나가질 않았다. 그의 폭력과 독설 앞에선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겁이 났고 무서웠다. 눈을 마주치기가 두려웠다. “태양아....... 영원이 때리지 마라. 내 마음도 아픈데...... 넌 어떻겠냐. 후회.....할 짓 하지마” “입 다물어 휘준. 수틀리면 먼저 죽는건 니가 아니라 영원이니까” “.......찾아온 것도......나고.....그날 데리고 ......간.....것도 나야.....” “알고 있어. 그 날 일은 나도 상당히 유감이야. 그래서 경고했잖아. 너야말로 후회할 짓 하지 말라고” “........” “난 충분히 참았고 생각했다. 너였기에 용서했고...... 그래서 오늘 내 발로 여길 찾아온 거야. 하지만 내가 지금 본건 뭐지? 뒤통수 두 번 맞으면 사람이 돌아버릴 수 있다는 걸 감안하고 행동했어야지..” 바닥에 고이기 시작하는 피를 보면서 눈앞이 자꾸 흐려짐을 느꼈다. 이젠 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점점 떨구던 나는 턱을 잡아 올리는 태양의 손에 얼굴이 들려졌다. 마주 본 그의 눈은 어리석은 나의 행동을 탓하고 있었다. 그저 원망하고 있었다. “날 변하게 한거 인정해. 너 때문에 달라지려고 노력했어. 이런 기분 나를 미치게 말들어. 왜 이렇게 흔들어 놓는거야” “..........미안해” “저 녀석이면 죽일 수도 없잖아...크큭..” 태양은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내며 내 앞에 주저앉았다.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준이 집에들어오기 전으로.. 아니 그의 바이크에 몸을 싣기 전으로.. 하지만 시간은 지금도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해줄까.니가 원하는게 뭔데?” 담배를 꺼내 물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었다. 힐끗 준에게 시선을 주니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상처가 심한지 식은땀이 그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한번만 더 그쪽으로 시선주면 진짜 죽여 버린다..” 위협적인 말에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고 준이 신경 쓰였다. 그의 진심이 신경 쓰였다. “너........” “.........” “니가 필요해”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데. 내가 필요하면 나에게 왔어야지” “.........겁이 났어. 미안했고 용기가 없었어” “내 오해다? 그럼 왜 눈은 흔들리고 있지?” “.........” “내꺼 공유하는 취미 없어. 기분 더럽고 열 뻗쳐. 너한테 관심보이는 새끼들이 많아서 짜증나. 더 귀찮아지면 널 던져버릴지도 모른다고... 알아들어?” “........귀찮으면...날 버리겠다는 말이야?” “널 쓰레기 취급하는 그 따위 발언은 지껄이지마. 버려지는건 개새끼나 물건이지 니가 아니야” “.....난 자격이 없어” “........좋은 핑계군. 도망치겠단 뜻인가?” “.......” “얼마든지 도망쳐. 그리고 평생 비겁자로 살아. 그게 아니라면 날 움직여봐. 아직은 용서가 안되지만 너라면 할 수 있지 않겠어?” “.......” “그리고 경고하는데..... 날 선택할게 아니라면 평생 내 눈에 띄지 않는 게 좋을거야” 말하는 동안 담배를 다 피운 그는 바닥에 비벼 끄고는 일어났다. 나는 발끝만을 바라보며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던진 말을 곱씹어 생각해보는 동안 발자국 소리와 함께 멀어져갔다. 태양은 내가 있는 집을 떠났다. 한동안 멍하니 앉아있던 나는 준의 신음소리에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상태가 보기보다 심각한 것 같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그의 몸을 조금 일으키자 아픈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안되겠다고 생각한 나는 서둘러 구급차를 불렀다. “제기랄.......” “....괜찮아?” “아파....무진장.....” “조금만 기다려. 구급차 올 거야” “.........내 앞에서....꼭 그렇게....말해야겠냐?” “기절이라도 하지 그랬어...” “킥....진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더라...... 근데 젠장..... 니 목소리가 왜.... 그렇게 또렷히 들리는지.......” “말 그만해. 너 숨넘어갈 것 같아” “.......넘어가라지......씨발...” 그의 머리를 받쳐 들고 무릎에 올렸다. 땀에 엉겨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찡그리고 있던 인상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나를 감싸주고 나 때문에 상처받는 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행복해지는게 이렇게 어려운걸까. 그저 한 사람에게 사랑받기를 원하고 한 사람만 바라보았는데 왜 뜻대로 되지 않는 걸까. 아버지.. 제가 많이 부족한가요. 그는 나에게 너무 벅찬 상대인가요. 만용을 부리는 걸까요. 누군가 나에게 ‘니가 갈 길은 이곳이다‘라고 가르쳐줬으면 좋겠다.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이 힘들기만 했다. 차라리 태양이 무시하고 내가 줄 곳 짝사랑 할 때가 마음은 더 편했던 것 같다. “영원아.....” 구급차에 함께 이송되면서 준은 들것에 누워있고 나는 그 옆에 앉아있었다. 부르는 소리에 감겨있던 눈을 뜨니 그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잡아줘” 그래. 그때도 이 손을 뿌리치지 못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고 말았지. 나는 한동안 그 손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내 손이 그렇게 이쁘냐?” “............마지막이야” “........” “이젠 내밀어도 잡지 않을거야. 이번이 마지막이야” 두 손을 겹쳐 그의 손에 포개었다. 차갑고 마른 손이 느껴졌다. 지금은 내가 잡아주지만 언젠가 이 손을 따뜻하게 해줄 누군가가 나타나겠지. 그 동안만 힘들지마. 너를 지키고 예전의 모습으로 있어줘. 안 그러면 내가 너무 아플 것 같아. 그의 손을 당겨 얼굴을 묻었다. 준은 즉각 입원요망이라는 의사의 판단과 나의 강요로 한동안 병원에 있게 되었고 나는 상처가 그리 심하지 않아 바로 학교에 나올 수 있었다. 폭풍 뒤에 찾아온 고요함처럼 학교는 내게 알 수 없는 정적을 던져주었다. 아이들은 평소와 같았고 교실도 변한게 없었지만 이상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어디 가는데?” “답답해서..” 옥상에라도 올라가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우가 물었다. 요즘 그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어색해진 것도 같고 조금 차가워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나에 대한 배려는 변함이 없었다. 양해를 구하고 살짝 교실을 빠져나왔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예전에 느꼈던 설레임이라던가 기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걸 깨달았다. 태양은 이제 나를 찾지 않을 것이다. 문이 조금 열려있기에 설마 하는 생각으로 들어서니 낮익은 뒷 모습이 보였다. 오래전부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의 모습이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살짝 뒤 돌아 본 그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는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나를 보지 않는구나.. “태양인 여기 오지 않아” “...........알아..”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주변에서 미세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다. “준이 입원했다면서?” “.........응” “......너도 별로 좋아보이진 않네” “...........” “그 날 때린거 미안하다” 성록의 사과에 또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이들이 보통사람들과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태어 날 때부터 부와 명예를 짊어지고 호의호식했으며 누구에게 감히 머리를 숙여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생각도 감정도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가가기 어려웠고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겨우 18살이었고 그 또래의 아이들과 똑같이 사춘기를 겪는 고등학생이었다. 친구가 없으면 외롭고 남의 마음에 상처 입히면 자신도 괴로워했으며 사랑을 하면서 아파했다. 우린 똑같이 어렸고 똑같이 부족했다. 서로를 헐뜯기보다는 서로를 감싸줘야하고 슬픔보다는 기쁨을 나누어야 했다. “그날 너희 집 앞에서 기다리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 성록은 난간이 위치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나도 옆으로 가서 그늘 쪽으로 앉았다. 나란히 앉아있으니 갑자기 땡땡이 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성록과는 두 번째다. “내가 왜 한영원한테 집착하지?” “.........” “그래..그건 집착이었어. 깨닫고 나서 나조차도 놀랬지만..” “......집착?” “설명하자면 복잡해. 아직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너에게 끌리는 감정과 친구들에 대한 감정이 뒤죽박죽되면서 니가 눈앞에 보여야만 마음이 진정 되곤 했어. 처음엔 조금 신경이 쓰이다 나중엔 온 신경이 너한테 쏠리는거야. 감정이 내 마음대로 제어가 안되는데 미치겠더라구. 그런 상태가 계속되니까 화가 나더라. 준이 바이크에서 내리는 널 보고 폭발해버렸지” “........나 살아있는게 다행인거네” “.....내가 화난다고 살인낼 것 같았나?” “그냥...너 화내면 엄청 무서워. 얼굴도 굉장히 무서워져” “글쎄.. 나에 비하면 태양인 수도승쯤 되나..” “...........” “내가 만일 태양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봤어. 생각만으로 화가나서 도저히 답이 안나오더라” 나는 조금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화가 폭발해서 준과 나의 상태가 이지경이 되지 않았는가. 이 상처들은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게 아니란 말이다. “한영원이 4년동안 사랑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태양이잖아. 충분히 화날 만 했어” “.......” “태양이가 뭐라고 해?” “응?” “뭘 되물어.. 무슨 말이든 했을꺼 아냐” “........” “말하기 싫어?” “......아니......잘 모르겠어. 태양인 용서할 수는 없을 것 같지만 마음을 돌려보래. 하지만 난 자신이 없어” “이봐. 넌 자신감 빼면 시체인거 몰라? 생각보다 태양이 너한테 많이 약하다. 속마음을 잘 말하지 않는 녀석이지만 한 번 정 준 사람한테는 무척 신경 쓰고 챙겨주는 성격이야. 잘 모르고 있겠지만 너 때문에 요즘 많이 힘들어하더라” 내 앞에서는 늘 강하고 당당한 모습만 보여줬었다. 그의 강함을 동경했고 자신감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도 감정이 있는 사람이다. 아마 힘이들땐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었을꺼다. 그런데 나는 헤아리지 못했고 배려하지도 못했다. 부족함이 원망스러워졌다. “준은.......행동력이 뛰어나” “........” “나쁘게보면 경솔한 면이 없지 않지만 솔직함으로 오해를 사는 일은 드물어. 아마 너에게도 확실히 못을 박았겠지..... 난 태양과 준이 상극이라고 생각해. 둘은 서로 좋아하긴 하지만 이루어지기엔 뭔가 부족하지. 넌 그들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으니 어쩌면 이런 결과는 당연한건지도 모르고..” “......준에겐 확실히 할 거야” “난 역효과를 걱정하는거야. 어릴 때부터 준은 잡히지 않는 것에 더욱 매달리곤 했어. 그리고 결국 자기 손에 넣었지. 먼저 버리는 건 항상 자신이어야 했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기부터 망가져” “.......철이 없구나” “하하......어쩌면........... 이제 게임은 셋이서 해. 난 더 이상 끼어들기 싫어. 니가 중간에서 어떻게 조율 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겠지” “.......” “하지만 난 니 편이니까 힘들면 말해. 정을 생각해서 한두번 정도는 손을 잡아줄테니까” “............고마워.....” “별말씀을..” 성록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하늘로 향했다. 그는 친구를 등져버리지도 나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깊은 배려에 고마웠고 멋진 선택에 감동했다. 언뜻 그의 모습과 문우의 모습이 겹쳐보이는것도 같았다. 친구란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해주었고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태양이 교실에 있다는걸 확인하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문 앞으로 달려갔다. 그를 만나면 어쨌든 대화를 시도 할 참이었다. 하지만 하교하는 아이들이 모두 빠져나오는데도 태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교문을 통과해서 어디든 갈텐데 아직까지 나오지 않는거라면 아직 교실에 있거나 내가 들은 정보가 잘못된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런 허술한 정보통을 봤나! 나는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그의 교실로 뛰어갔다. 뒷문이 열려있는걸 보니 사람이 있긴 한가보다. 살짝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는 교실에 나의 태양이 홀로 앉아있었다. 아...이렇게 감격스러울수가. 나는 혼자 감동 먹고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그에게 다가갔다. “.....누구 기다려?” 바로 앞자리의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그가 나를 바라봐주었다. “교문에서 너 기다렸는데..” “.........” “태양아” 불러도 대답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시선을 받아내려니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피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나 너한테 미안해서 오늘 맛있는거 해주려고.. 뭐 먹고 싶은거 없어?” “........” “.....아직 많이 화났어?” “.................아니” “.......” “집에 가자” 태양은 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이대로 그냥 가면 마음이 무거울 것 같았다. 어서 그의 짐도 나의 짐도 털어버리고 싶었다. “태양아!” 나는 결심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 “너한테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해. 믿음을 저버려서 정말 미안해”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멋지게 말하고 손을 내밀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에 입술만 깨물고 있자 태양이 뒤돌아서 다가왔다. 노을 지는 하늘이 그의 눈에 비치고 있었다. 그와 함께 걷기를 꿈꾸던 풍경이었다. “시작은 소중한거야” “........” “너와의 시작이 조금 어긋나서 난 잘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널 아프게하고 상처 입혔지.... 다시 시작하고 싶다면....... 널 아프게 한 나도 잊어줄 수 있지?” 기어코 참고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태양은 내 손을 맞잡고 다른 손으로 눈물을 닦아 주었다. Part 11. sunrise [태양] 그가 고개를 숙였을 때 깨달았다. 진정 원하는건 내 앞에서 나약해지는 모습이 아니라 나를 마주 볼 수 있는 당당한 너였다. 나의 부족한 허물쯤은 덮어주고 채워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필요했다. 나는 필요에 의해 그를 선택했다. 그리고 방관했다. 그리고 시험했다. 그리고 그를 상처 입혔다. 내게 있어 가족은 안개와 같은 존재였다. 가까이 있었지만 결코 잡을 수 없었다. 어머니란 사람은 자식을 의지하지 못할 때 그녀에겐 더 이상 남는 것이 없었다는 걸 죽음으로 깨닫게 해주었다. 어머니의 사인은 병마를 이겨내지 못한 냐약한 육체의 포기였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건 다름 아닌 비어버린 눈에 담겨진 외로움이었다. 그녀는 견딜 수 없어 자살했다. 그렇게 삶을 포기했다. 집은 가족의 따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린 날의 행복한 추억과 동심은 내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의도하지 않은 강인함으로 무장하게 만들었다. 힘은 외부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해주긴 했지만 그들과 통하는 유일한 길을 막아버렸다. 단절. 대화의 단절. 관계의 단절. 위안의 단절. 감정의 단절. 사랑의 단절. 왜 서로 사랑해주지 못했나요? 어째서 책임지지도 못할 동기를 만드셨나요? 후회하기 전에 조금만 더 노력하시지 그랬어요. 원망도 미련도 부질없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단 한번도 보인 적 없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셨다. 어쩌면 어머니의 죽음보다 그것이 나를 더 놀라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얼굴을 싫어했다. 거울을 통해 또 하나의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머니의 아픈 눈동자가 떠올랐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포근한 정을 느낀적은 별로 없지만 어머니였다. 품이 너무나 그리운 하나밖에 없는 어머니였다. 자신의 반려를 떠나보낸 후 한동안 괴로워하던 아버지는 나에게 용서란 단어를 구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탓 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두 분의 어긋난 운명이었고 서로를 감싸지 못한 결과였다. 책임은 모두에게 있었다고...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나의 오산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를 배신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족을 버렸다. 그나마 가슴속에 남아있던 작은 불씨마저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어떤 변명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아버지는 많이 달라지셨다. 나에게 끊임없이 이해와 관심을 보이셨다. 지금이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였다면 내가 가족의 행복을 꿈꿀 때였다면 나 또한 마음의 문을 닫는 일도 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당신도 고통스러워봐라. 배신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상처받는 기분이 어떤지 외로운게 어떤건지... 당신도 한번 느껴봐라. 아버지는 나의 차가운 행동도 모진 말들도 다 받아들이셨다. 그렇게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셨다. 언제부턴가 마음속에서 완전히 꺼진 줄 알았던 불씨가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결국 아버지란 말이다. 혈육의 정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그는 하나 남은 내 가족이란 말이다. 미움과 증오 불신과 외면... 모든 것이 부질없어졌다. 남는 건 상처밖에 없는 그것들을 나는 던져버리기로 했다. 정확히 1년 6개월 후 나는 아버지를 닮은 또 하나의 혈육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년간 아버지만을 바라본 두 번째 어머니를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 모든 불화가 자신의 탓인양 사죄하고 또 사죄했다. 그 당시 나는 조금 초연해져있어 단지 아버지란 사람의 마음을 가져간 누군가가 몹시 궁금했을 뿐이었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면 아마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겠지. 시선을 끌었던건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그녀는 조금 창백한 피부에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인형같은 여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가 내 앞에서 머리를 숙일 때 당당히 마주보았다. 조금의 굴욕이라도 던저준다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은 나를 진부한 상황과 진부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흥밋거리는 이상한 즐거움을 던져주었다. “도대체 지금 몇시인줄 아니?” “..........니 앞에 시계 있네” “정말 못말리겠구나. 아버지랑 엄마가 아무 말씀 안하신다고 너무 멋대로 굴고 있잖아. 집에서 걱정하는 사람 생각도 해야할꺼 아냐” “.....내 걱정을 너무 과하게 하는거 같은데. 알아서 잘 하고 있으니까 신경꺼” 그녀의 간섭은 집에 들어온지 두달이 지나고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아버지의 가족이었지 나의 가족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가 남매로 보이지도 않았다. “최정희. 남편 기다리는 마누라처럼 새벽 2시까지 거실에서 눈 부릅뜨고 있을꺼 없어. 너 무섭다구” “어떤 해석을 가져다 붙여도 좋은데..미안하지만 내 진심을 굳이 비유하자면 아들 기다리는 엄마의 심정이라구. 내가 누누이 강조하잖아” “완전 애늙은이가 따로 없군. 넌 내일 학교 안가? 머리 꼴 하고는..” “내 스타일에 태클거는 일 따윈 하지 말아줘. 나도 니 외모에 대해선 잔소리 안하잖아” 그녀의 특이한 취미 중 하나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여중생의 깔끔한 단발머리는 도저히 상상이 안되는 발칙한(?) 취향에 나는 조금 충격을 받았다. 처음 봤을 때의 단아한 생머리는 기억도 가물가물했다. “너 그러면서 내가 막상 기다리지 않고 집에 불이 꺼져있으면 많이 섭섭할걸” “......좀 섭섭해봤으면 좋겠는데..” “예전부터 궁금한게 있는데. 지금 이 시간까지 도대체 뭘 하다 오는거야?” “쓸데없는 궁금증은 몸에 해로워” “그럼 왜 외박은 절대 안하는 건데?” “.........” “내가 밤새도록 기다릴까봐?” “착각도 몸에 해로워” 정희는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응시하기만 했다. 시선이 거북해질 때 쯤 나는 물을 마시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를 여는데 갑자기 물을 가로채는 손이 있었다. “너 상당히 유명하더라” 정희는 컵에 물을 따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최태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던데. 니 친구들도 그렇고..” “........” “너와 나의 사이를 알면 내게 어떤 피곤한 일들이 벌어질까부터 생각나더라구. 골빈 것들이 달려들어 니 싸인이나 소지품이라도 내놓으라고 하면 아마 내 성질에 유혈사태가 벌어질거야. 아무튼 너 굉장하던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넌 남들의 시선을 당연시하더라.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라구. 너무 인간미가 없잖아” “너도 만만찮은 것 같던데 니 이미지 관리나 잘해” “하기야... 넌 그게 매력이긴 하지만... 있잖아. 날 니 친구들에게 소개시켜주는게 어때?” “서로의 생활영역을 침범하는건 피곤한 일이야” “난 궁금해. 너랑...... 니 친구도” “가족에게 보이는 관심치고는 도가 좀 지나치다” “...........어쩌면...” “뭐?” 말을 얼버무리며 냉장고에 물병을 다시 넣은 정희는 나의 시선을 피하며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외모와는 달리 털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는 이상하게도 화를 내기가 힘들었다. 기분에 안 맞으면 무시하고 성질부터 부리던 나였기에 그것은 작은 변화였다. 예상대로 그녀는 나를 변화시키고 흔들었다. 현실을 바로 보고 인정하기엔 우린 너무 어렸다. 정희의 지나친 관심을 친구들은 ‘브라더 컴플렉스’라고 해석했다. 그녀와 나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고 그렇다고 내가 살갑게 대하는것도 아니었다. 정희는 내가 인정한 첫 번째 ‘의지의 한국인’이었다. 왠만한 사람은 말도 잘 못붙이는 준이 녀석과 번번히 입씨름을 했고 성록과 승권이 무안주는 말을 해도 웃어넘기는 여유까지 보여주었다. 조금씩 그녀의 존재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계속되던 그녀의 헤어패션쇼는 ‘폭탄맞은 빨간머리’를 끝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그리고 일주일간 눈앞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질 때 쯤이었다. ‘똑똑’ 문쪽으로 시선을 주니 얼굴을 통 볼 수 없었던 정희가 검은 긴 생머리를 하고 나타났다. 심플한 잠옷을 입은 그녀는 내가 본 것 중 최고였다. “이렇게 하니 미친 여우가 개과천선 한 것 같니?” 문득 과감한 헤어스타일이 부담스러워 별 의미없이 던진 말이 생각났다. 그녀가 갑자기 오뉴월에 한을 품은 불여우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설마하니 그 말에 충격 받아 이렇게 대단한 변신을 할 줄은 미처 몰랐다. “묻잖아. 내가 아직도 미친여우 같아?” “그 소리 좀 그만해” “니가 한말 반복하는데 새삼스럽게 왜 그래? 넌 정말 상식 이하야! 어떻게 그런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니? 그리고 날 무시하는거야 뭐야. 일주일 동안 사람이 안보이는데 궁금하지도 않아? 어쩜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할말이 없어졌다. 뭐가 그렇게 분한지 얼굴은 빨개진채 꼭 쥐어진 두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내가 굉장히 나쁜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어코 정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걸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휴지를 들어 닦아주니 부드러운 살결이 손에 쓸렸다. 긴 머리에서 나는 달콤한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들어 붉어진 입술에 시선을 두었다. ‘나쁜놈’이라고 중얼거리는데 화가 나기는커녕 유혹하는듯한 움직임에 흥분됐다. 그대로 얼굴을 내려 입맞춤했다. 조금 놀래며 밀어내는 듯 하더니 허리를 잡아 당기자 이내 잠잠해졌다. 입맞춤이 이렇게 기분 좋은것인줄은 미처 몰랐다. 그저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을 뿐인데도 정희를 감싸고 있는 기분 좋은 향기가 나에게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입술을 떼어내자 눈을 감고 있던 정희의 눈이 살며시 떠졌다. 아직 물기가 남아있는 눈은 투명하고 예뻤다. 그리고 보았다. 그녀의 눈 속엔 천륜을 어기고 욕심을 채우려는 추악한 내 모습이 있었다. “정희야” “.......” “최정희” “.......말해..” 앉아있는 자세가 불편했는지 정희가 움직이자 침대의 진동이 느껴졌다. 머리가 조금 무거워 그대로 누워버렸다. 눈에 보이는건 이미 어두워진 천장이었다. “넌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 “.......” “난 힘들꺼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이외의 가족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아버지가 들어오셨어. 모든 문을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 사람은 변하더라. 너와 너의 어머니를 집으로 들인 건 아버지가 원해서였어. 나는 아무래도 좋았지. 상관하지 않으면 되니까. 하지만 이젠 상관하지 않으려했던 사람도 만일 없다면 가족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어. 이미 기준점이 되어버린 다리를 건넌 것 같아.” “.......이젠 우린 가족이라는거니?” “그게 아니면 함께 할 이유가 없는거잖아” “.........정말 잔인하구나” 확실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상처가 된다해도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나중의 더 큰 상처를 막을 수 있다면 지금의 행동은 옳은 것이다. 나는 가족이란 이름을 좀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두 번째 어머니는 첫인상과는 달리 소탈한 성격을 가지고 계셨다. 그녀는 나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나를 아들처럼 대하려고 애썼고 말을 하지 않는 부분까지(대부분이었지만) 신경 쓰고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정희와 닮은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틀어진 일이 있더라도 마음에 두지 않고 금세 밝은 모습을 찾았다. 나의 무심한 행동에도 감싸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럴 때마다 친어머니의 모습이 안타깝게 떠올랐지만 이젠 그런 기억들이 점점 희미해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환경에 길들여져가고 있었다. “그래서...잤어?” “........” “왜 대답을 못해?”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데?” “.......너 내가 우습냐?” “.........” “지금 내가 할 짓이 없어서 너한테 이딴 질문이나 하고 있는 것 같아? 우리사이라고 정조 운운하지 말란 법 있나? 기분 상당히 더러워지려고 한다” “준아...... 니가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아주 웃겨. 브라콤의 정도가 지나치면 원래 그런거냐? 처음부터 널 쳐다보는 눈빛부터가 거슬린다했지” “그만해. 쓸데없는 일로 너랑 싸우기 싫어” “아아..그래. 나불대는 내 입만 아프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준을 보며 맞은편 책상에 앉아 지켜보던 성록이 한숨을 쉬었다. 늘 중간에서 어느 정도의 참견과 잔소리는 감수하던 녀석이 오늘은 기분이 내키지 않나보다. “승권인 왜 이렇게 안오는거야” 투덜대는 준의 머리를 잡아당겨 이마에 길게 입맞춤 했다. 평소엔 지나치게 차가운 녀석이 기분이 틀어지거나 마음에 안들면 그 성질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입맞춤에 황당해하던 녀석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하더니 내 목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가볍게 응수하고 떨어지려는 의도와는 달리 열정적으로 부딪쳐오는 준의 행동에 조금 당황해 버렸다. ‘딱’ “씨팔...” “어딜까대. 죽을래?” 정말 살의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는 준과 니가 노려보면 어쩔건데라는 눈빛으로 응수하는 성록사이에 불편한 기류가 흘렀다. 확실히 준의 뒤통수를 때린건 그의 심기가 많이 불편하다는 증거였다. 이러다 둘이 싸움이라도 나면 정말 골치 아프다. 준의 폭주를 말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성록이었다. “왜 나만 때려. 사람 차별하냐 이 새끼야” “말조심 안할래?” “씹. 평소에 가만히 있으니까 이게 아주 날 만만하게 보네” “말조심 하라고 경고했다” “못하겠다. 이 씹새..” ‘퍽’ “욱!”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말릴 틈이 없었다. 발길질에 그대로 뒤로 넘어간 준이 눈에 불을키고 덤비기 시작했다. 혼자 힘으로 말리기엔 역부족일 것 같아 교실 문을 슬쩍보니 때 마침 승권이 경악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실력도 만만찮은 것들이 봐주는 것 없이 폭력을 휘둘러대니 그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일단 미친것들에겐 매가 최고다라는 나름대로의 결론에 승권에게 준을 맡기고 성록의 뒤에서 목을 휘감고 뒤로 넘겨 바닥에 꽂아버리니 조금 잠잠해졌다. 승권에게 얻어터지고도 계속 덤비려는 준에게 내가 인상을 쓰자 그제서야 행동을 멈추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하여튼 이 녀석에게는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잘한다 잘해. 내가 좀 늦었다고 이렇게 스트레스를 푸냐?” “조금만 더 늦었으면 교실에 온전히 남아있는 물건이 없었을거다. 지들이 무협영화 주인공쯤 되는줄 아니보지” 성록은 옷을 털고 일어나서는 언제 싸웠냐는 듯 태연한 모습으로 다시 책상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었다. 준과 녀석이 싸우는 일은 극히 드물었는데 오늘은 확실히 성록이 먼저 도발했다. 아직도 분한지 씩씩대고 있는 준에게 담배연기를 내 뿜으며 슬쩍 웃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났는지 갑자기 표정을 싹 굳혀버린 준은 한동안 성록을 노려보더니 가방을 들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준아! 같이 가 임마” “씨발!!!!!!!!!!! 한번만 더 키스하는데 뒤통수 때려봐. 나쁜새끼” 녀석이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우렁찬 목소리로 교실을 한번 흔들어 놓은 뒤 유유히 사라지자 남은 건 충격받은 표정의 승권과 피식 웃음을 흘리는 성록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준인 내가 데리고 갈테니까 둘이 먼저 가있어” 성록과 승권을 뒤로하고 교실을 빠져나왔다. 오랜만에 같이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수포로 돌릴 순 없었다. 친구들은 나에게 가족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어린시절부터의 유대관계란 생각보다 강한 힘이 작용했다. 시작은 집안끼리의 친분을 위한 형식적인 만남이었지만 워낙 그런데 얽매이지 않는 녀석들이라 오히려 그것이 서로에게 더 호감을 느꼈던 부분이었는지 모른다. 셋 모두 든든한 친구였지만 준은 조금 달랐다. 정희도 인형같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준에 비하면 그리 칭찬할 외모는 아니었다. 외모로 잠깐 시선을 끌었다면 마음을 붙들어 맨건 녀석의 전부였다. 그 자체만으로 빛을 가지고 있는 녀석이었다. 우리 중 가족이 가장 많은 집에서 자랐고 두 명의 형과 한명의 여동생을 가지고 있는 셋째였다. 어떤 때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큰 형같은 모습도 보여주고 어떤 때는 분위기 메이커로 재롱도 떨줄아는 막내 같은 모습을 보여주기도했다. 녀석이 빠진 우리는 몹시 심심할 것도 같았다. 그 중 성록과는 어머니들이 친구여서 태어날 때부터 왕래가 잦았던터라 가장 오랜 사귐을 가지고 있었다. 가끔씩 티격태격해도 서로 많이 위해주는걸 알고 있다. 준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관심을 보인 건 근래였다. 처음엔 가벼운 장난으로 시작했다. 워낙 예쁘장한 외모로 시선을 자극하는 녀석이여서 가끔씩 볼에 입을 맞추거나 껴안거나하는 장난을 즐겨(?) 하곤 했는데 짜증으로 응수하던 그가 어느 날부터 적극적으로 반응해왔다. 조금 당황했지만 내가 먼저 시작한 장난인데 그만두는 것도 우습고해서 맞장구 쳐주다 보니 지금은 거의 애무수준이 되어버렸다. 성적 성향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나이도 아니었고 사춘기 소년들의 장난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가 지나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조금 의심하게 되었다. 분명 여자와는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정희와의 입맞춤은 나른하고 기분이 좋았지만 준과의 키스는 지나친 흥분과 자극을 던져주었다. 그리고 서서히 깨달았다. 나는 남자를 원하고 있었다.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건 아니었다. 조금 놀랬을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여자에게 어떤 거부감을 느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나약함이나 휘둘리는 모습이 너무나 싫었다. 나 자신을 지키고 무장할 힘은 있었지만 원한건 더 강한 존재였다. 힘이들 때 기댈 수 있는 어깨가 필요했다. 준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기를 보여줬다. 그는 내가 가지고 있는 외로움이 어떤 건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항상 어깨를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는 녀석이었다. “준아” 건물 현관을 빠져나가려는 준의 팔을 잡아 세웠다. 감히 앞길을 막는 인간이 나인걸 확인하고 얼굴의 인상을 조금 누그려뜨렸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는데” “.......꼴보기 싫어” “누구? 나?” “전부” “하하. 우리 준이 왜 이렇게 뿔이 나셨을까” 어깨를 감싸고 껴안으려하자 밀치며 거부했다. 풀어주려고 이렇게까지 노력하는데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도 더 이상의 행동은 내키지 않는다. 내가 갑자기 조용해지자 뒤돌아서있던 녀석이 슬쩍 곁눈질을 한다. 그리고 몸을 틀어 마주보았다. 입은 열지 않고 눈만 마주치길래 무슨 말이든 하라며 턱짓을 해주었다. “야” “.......” “모른척 하는거야. 아님 놀리는거야” “..........뭐가?” “.................됐다 임마” “말 끝까지해” “....뭐든 한번이면 정 떨어지는거야. 최소한 두 번쯤은 시도를 하라구” “.........두 번 안아달라는 소리냐?” “그럼 이 상황에 내가 널 안으리?” 나는 헛웃음을 내뱉으며 준을 안아주었다. 이젠 키도 비슷하고 덩치도 커져서 어릴 때의 준처럼 품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그가 나를 안아준다 해도 이상해보이지 않을거다. 우린 그렇게 성장하고 있었다.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많이 어렸다. 그리고 그날을 후회한다. 조금만 늦게 조금만 내가 성장했을 때 그를 만났더라면 상처를 반으로 눈물을 반으로 최소한 그렇게 해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기적이고 부족했다. 영원을 처음만난 날은 지독하게 흐린 날이었다. 이런 날은 집에 들어가기가 죽기보다 싫었다. 우울한 얼굴의 어머니가 떠오르는 지독하게 흐린 날이었다. 학교에서 가까운 공원을 지날 때였다. 멀리서 음악소리를 들었는데 조금 가까이가보니 내 또래의 아이들이 고등학생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곳에서 깊고 맑은 눈을 가진 그를 보았다. “저것들 진성고 양아치들 아냐?” “......맞네” “오밤중에도 설쳐대는걸 보니 많이 심심한가보네” “덤빌 생각인가본데?” “그냥 가자” 아이들의 말소리를 뒤로하고 곧장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앞의 상황이 더 신경쓰였다. 그의 앞에 서있던 놈이 주먹을 찔러오는걸 가까스로 막을 수 있었다. 약한 놈은 아니었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았다. 조금 여유를 가지고 첫마디를 꺼냈다. “도와줘?”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앞의 녀석이 다시 공격하려는 기세를 보였다. 잡고 있던 주먹을 비틀고 최대한 꺽어줬다. 상당히 충격이 컸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모습에 비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관심을 돌렸다. 기다리는건 익숙하지 않았다. 내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상대한테 미련을 갖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나는 주저 없이 뒤돌아섰다. “저..저기.....도와주세요”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처음엔 그저 그런 평범한 아이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보였다. 눈이 예뻐서였다면 그의 곤란한 상황을 해결해주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확인했다는 걸로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그가 다가왔다. 예상을 뒤엎는 행동에 조금 놀랐다. 내게 그런식으로 당당하게 관심을 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답례의 입맞춤은 나를 묘하게 흥분시켰다. 다시 만나게 되리란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따뜻한 눈을 가진 그는 그 속에 슬픔 또한 간직하고 있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우습게도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그는 나보다 강했지만 상처 또한 커서 감당할만한 확신이 없어졌다. 차가운 표정 뒤에 부끄러운 내 자신의 나약함을 숨겼다. “너한테 뭘 바라는게 아니야. 최소한의 관심정도는 보여줄 수 있잖아” 계속되는 나의 외면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급해하지도 않았으며 귀찮을 정도로 매달리지도 않았다. 솔직히 그 인내심에 감탄을 할 정도였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은 가족 없이 혼자 남겨진 세상에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었다. 안타깝고 미안했다. 손을 잡아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태양아. 나이가 들면 내 머리가 더 자랄까?” “.........” “빨리 자랐으면 좋겠다. 지금은 모르는게 너무 많아. 그래서 내 뜻대로 안되는게 너무 많아..” 나도 자라면 용기낼 수 있을까. 너처럼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까. 그 날 처음으로 그를 안아주었다. “음....흣........야..” 준의 찡그린 얼굴로 땀이 흘러내렸다. 움직임을 잠깐 멈추고 숨을 골랐다. 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너 자꾸 딴 생각 할래?” “........” “우리 지금 두달만에 하는거다. 니가 댈꺼아니면 똑바로 해” “.............집중할께” 건방진 소리에 힘껏 피치를 올려주니 입술을 깨물고 신음을 삼킨다. 눈을 마주치며 준에게만 신경을 쏟았다. 주로 내가 탑을 하지만 준 또한 탑을 원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서 많은 충돌이 있었다. 다른건 양보하는 편이었지만 그것에 대해선 나도 완강했다. 확실히 그는 나에게 바텀 체질이었는데도 이상한 고집을 부리곤 했다. 관계에 익숙해진 지금은 덜하지만 가끔씩 기분 내키지 않으면 저런 소리로 내 신경을 건드리곤 한다. 그는 섹스에 있어서는 담백했다. 아주 감상적이 되어있을 때를 제외하곤 그것을 감정과 연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나 또한 준을 좋아하긴 했지만 깊은 감정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상황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와의 관계는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너 요즘 욕구불만이냐?” “.........무슨 소리야” “왜 이 새끼 저 새끼 다 후리고 다니는데?” 내 난잡한 성관계를 그가 모를리 없었다. 일종의 유희였다. 당시 나는 준 외의 상대들과 굉장히 하드한 섹스를 즐겼는데 늘 새로운 상대였으며 한번 이상의 관계는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조금 즐기고 싶었다. 영원을 안본지도 두 달이 넘었다. 그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어떤 기분인지 나는 깨달았다. 많이 허전했고 보고 싶었다. 수 년 동안의 기다림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미 나에게 큰 의미가 되어있었다.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너 그러고 다니는 꼴 보기 싫어” 준의 말에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애증도 질투도 정욕도 아니었다. 단지 안타까움과 걱정만이 들어있었다. 드러난 하얀 어깨에 입맞춤했다. “그럼 내 채찍을 맞아 줄꺼야?” “무..뭐? 너 변태야?” “필요하면 말하라면서... 요즘 화끈한게 땡기는데 어때?” “씨팔. 비켜! 미친놈!!” 내가 정말 채찍을 들고 설쳐대는줄 알았는지 경악한 그의 표정에 웃음이 나왔다. 한편으로 나를 진짜 그런 변태적인 취미를 가진 인간으로 보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자 벌레 보는듯한 시선을 거두었다. 확실히 교육이 좀 필요한 녀석이다. “요즘 니 스토커 안 만나냐?” “........영원이?” “그래. 널 영원히 스토커 할 것 같은 그 이상한 녀석 말이야” “안 본지 좀 됐어” “.........넌 그 녀석이 한없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쳐다볼 때 아무렇지도 않아?” “.......” “............그 녀석 때문이지?” “........” “젠장......널 어쩌면 좋냐..” 이마에 손을 얹고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가슴에 머리를 얹고 누웠다.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그대로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4년 동안의 숨바꼭질은 이젠 충분했다. 영원에게 나를 보여주고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헤쳐나갈 고난이 더 많겠지만 혼자가 아닌 둘이라면 훨씬 힘이 날 것 같았다. 성록이 영원에게 관심을 보인 건 그 때쯤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원을 남들도 좋아할 수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더군다나 그를 가까이에서 보아온 성록이었다. 둘도 없는 내 친구였다. 나는 영원의 지치지 않을 것 같은 기다림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었다. 쓸데없는 자만심이 불러온 결과였다.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를 능욕하고 상처줬다. 깨진 병에서 흐르던 그의 피와 슬픈 얼굴에 흐르는 그의 눈물을 보았을 때 나 자신을 버리고 싶었다. 그 날........ 나는 영원을 만난 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영원의 앞에서는 늘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했다면 정 떨어지는 말투도 생각 없는 행동들도 충분히 안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좀 우스운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만일 나 같은 인간에게 끌렸다면 겪어보고 한 일주일 만에 정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웃음이 나왔다. “이제 오냐?” “........어떻게 들어온거야?” “아~ 니 여동생꺼 슬쩍 했지” 재협이 들고 있는건 딱 하나 복사해둔 정희의 열쇠였다. 사년만에 한국에 들어온 녀석을 계속 무시한건 나의 노력을 짓밟은 원망 때문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은 미안한 감정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뭐라 해도 녀석과 나는 지금까지 평생을 알아온 친우였다. “그래. 이리와서 얼굴 들이대. 각오는 하고 들어왔지?” “니 주먹맛을 보기 전에 한국 음식을 먼저 맛보고 싶은데.. 나 지금 무진장 배고파” “긴장감이 없으면 안되지. 내가 널 곱게 보내줄 것 같아?” “쳇.....무시 할땐 언제고.....” “차라리 무시할 때가 더 행복했다는걸 느끼게 해주지” 조금 거칠게 밟아주자 처음엔 곱게 맞아주려던 녀석이 덤비기 시작했다. 어릴때부터 ‘누가 더 싸움 잘하나’가 주 놀이였던 우리였기에 녀석이 본격적으로 덤비자 주위의 물건들이 상하기 시작했다. 이건 아니다 싶어져 마지막 일격을 가한 뒤 스톱을 외쳤다. 맞은게 아프긴한지 옆구리를 부여잡고 엄살을 부리기 시작했다. “넌 친구도 아냐.. 나쁜 놈” “친구소리 함부로 하지마. 다신 말 못하는 수가 있어” “흥. 친구친구친구친구..” 실성한 인간처럼 친구를 연발하는 녀석을 뒤로하고 먹을 것을 찾아보았다. 몇일 전 정희가 다녀간 뒤로 냉장고엔 제법 먹을 만한 음식이 꽤 있었다. 그리고..... 어제 영원이 만들어 놓고 간 돼지 찌개가 냉장고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릇위에 랩이 싸여있는걸 조심스럽게 꺼내 냄비에 다시 데웠다. 맛있다는 말 한마디조차 꺼내지 못했던게 생각이 났다. 난 여전히 바보다. “갠 누구야?” “........” “눈이 까맣고 얼굴 통통한.... 준이 말한게 걔야? “맞아” “흠........취향이 바뀐거냐?” “......갠 특별해” “오~ 최태양이 그런 단어씩이나 쓰다니.. 흥미로운데” “밥이나 먹어라” “.........너한테 뭔데?” “.......” “특별한 뭔데?” “...............나의 아르테미스” 순간 말하고 나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난 그의 순결을 원했던걸까. 그거야 말로 우스운 일이다. 난 얼마나 깨끗해서? 깨끗하기는커녕 더러운 흙탕물에 빠져 몸부침 치던 날이 더욱 많았다. 내 과거를 보여주기가 부끄러웠다. 왠지 그에게마저 흙탕물이 튀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너 방금 뭐라고 그랬냐? 아르 뭐??” “.....밥먹자” “.........미친놈” 더 이상 별 말 않고 밥을 먹는 재협을 보면서 슬쩍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속이 쓰린 그의 얼굴을 보고 마음이 불편했을꺼다. 4년의 공백은 길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우리로 돌아가기에 적당한 시간이었다. 말은 안했지만.........사실 그가 많이 보고 싶었다. 사람의 앞날이란 정말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데 뒤편에선 보이지 않는 올가미가 발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잡아당겨 넘어뜨릴 땐 예고조차 없었다. 그날 준이 말한 멋진 반전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예상했더라면 어리석게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거다. “우린 아냐... 그렇지?” 준이 결론과 동의를 동시에 담은 말을 던져왔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너와의 섹스는 최고였어. 아마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무슨 말이야?” 웃음기가 담긴 그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홀가분해 보였다. “무슨 말이긴.. 넌 이미 정리했잖아. 마음을... 안 그래?” “.........” “우리 참 오랜만에 둘이 만난다..그렇지?” “......그래..” “옛날 생각 나는데..크큭” “그렇게 오래된 것 같진 않은데” “과거잖아. 내가 과거가 되었다는건 정말 생각만해도 젠장인거 알아? 하지만 나도 마음 정리했어. 태양이 너도 이젠 내 과거야” “.........” “왠지 개운한 느낌이야.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라구” 나도 괴로운 적 많았지만 그도 마찬가지 였을꺼다. 아니...어쩌면 그가 힘든 날이 더 많았겠지. 무릎에 누워있는 그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나 너한테 고백할게 있는데..” “.........” “왠지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아” “.........” “그래서 이게 진짠지 아닌지 확인해 보려고” 준의 말을 들으면서 왜 영원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어쩌면 부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준의 마음과 영원의 마음 모두를 과신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결과는 생각보다 참담했다. 두 가지를 동시에 모두 잃어버렸다. 그리고 이성마저 잃어버렸다. 영원의 눈이 말하는 미안함과 준의 눈이 말하는 진심은 나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들의 피로 물든 하얀 천을 보면서 나는............ 슬펐다.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인가봐” “........” “누가 시키는것도 아닌데...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되는데... 그럴수가 없네” “........” “나만 그런걸까..” 아니..... 너만 그런게 아니야. 힘들어서 가볍게 버릴 수 있는 감정이면 세상 누가 힘든 사랑을 할까. 그건 너의 어리석음도 잘못된 판단도 아니야. 다만 우리가 너무 어리고 이기적이어서... 그래서 그런걸꺼야. 되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영원을 처음 만난 그 순간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마.... 힘들꺼라 생각했다. 왠지 어두운 미래만 보이는 것 같았다. 교실문을 통해 니가 들어왔을 때... 나를 기다렸다는 너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깨달았다. 너는 지금까지 나를 기다려준 것처럼 절대 먼저 등을 돌리지 않을 거라는걸. 끝까지 내 곁에 있어 줄거라는걸.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고 있다는걸.....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Part 12. secret 여름방학은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아르바이트란걸 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야 금전적으로 큰 부족함이 없어 생활에 불편함이 없었지만 앞으로의 학비나 생활비를 감안해볼때 조금씩 모아두는게 좋을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뭘 한다고?” “백화점 주차안내” “............그걸 왜 하는데?” “지금부터 경험을 쌓아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특별히 방학 때 할일도 없고 돈도 모아둬야되고.. 대학도 가야하잖아” “하지마” “.....왜?” “힘들잖아” “그럼 힘 안들이고 돈 벌수 있는 방법도 있어?” 무척 못마땅한 표정을 지은 태양은 근무시간까지 말해주니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처럼 방학이면‘태양따라 삼만리’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루에 10시간 일하고 얼마 받는데?” “한달에 80만원쯤.. 휴식시간도 있어서 실제로 일하는 시간은 7시간 정도야” “거기서 일하는 건 나이제한 없어?” “19세 이상.. 알잖아. 내가 너보다 한.살. 많은거” 조금 강조해서 말해주자 태양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지금 상황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딴 걸 꼭 해야되?” “.......꼭 해야되는건 아니지만 사회경험을 쌓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 뭐 고작 주차안내 아르바이트지만 여러 가지 일을 접해보면 분명 얻는게 있을거야. 우리 아버지도 사람은 여러 가지 경험을 많이 해봐야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고 했어” “어련하시겠어” “.........내가 일하는게 마음에 안들어?” “넌 내가 능력이 없어 보이냐?” “........” “너처럼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나도 생각은 있어. 그리고 그런일은 먼저 상의해야되는거 아냐? 다 정하고나서 말하는건 내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건가?” 어짜피 면접을 통과해야 결정이 나는 일이어서 미리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뭘 하던지 그가 크게 신경쓸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당황스러웠다. “그게 아니라... 어제 연락이 왔어” “혼자 결정하지마. 그리고 내가 다른 곳 알아 봐줄테니까 거긴 못간다고 해” “다른데라니? 벌써 가기로 했는걸..” “취소하라구. 거기보다 보수좋고 힘 안드는데 있으니까” “.......곤란한데..” 착하기로 동네방네 소문난(?) 내가 벌써 결정된 사안을 개인적인 이유로 번복한다는건 굉장히 곤란한 일이었다. 태양이 말한 보수좋고 힘 안드는곳이 구미가 당기긴 했지만 거절이나 약속취소 같은 일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대답 안할래?” “.........” “그럼 내가 대신 전화한다” 생각 좀 하자 생각! 무슨 일을 그렇게 일사천리로 해치우냐.. 나는 앞에 있는 오렌지 주스를 들이키며 태양의 눈치를 살폈다. 당장이라도 전화 할 모양으로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일단 생각 좀 해보자고 말을 꺼내려는데 갑자기 그 물건을 나에게 던졌다. 얼떨결에 받아든 그것은 얼핏봐서도 좋아보이는 신형 핸드폰이었다. 나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가지고 있어” “응? 어?” “........너 주려고 산거야” 눈을 크게 뜨고 핸드폰과 태양을 번갈아 보았다. 뭘 그렇게 바보처럼 쳐다보냐는 눈빛을 보낸 그는 주스를 한 모금 들이키더니 입을 열었다. “연락이 안되니까 답답하잖아. 얼굴 보려고 너희 집 앞까지 뛰어 가야겠냐..” “아......!!” “잘 간수해. 번호 아무나 가르쳐주지 말고” “.......되게 비싸 보인다....” 어이없게도 내 입에서 나간 말이라곤 고작 비싸보인다는 말이었다. 태양이 인상을 쓰고는 그런건 신경쓰지 말라며 투덜거렸다. 어째 내 눈엔 투덜거림으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잘쓸께. 고마워” 아르바이트를 하면 제일 먼저 구입하려던 물건이었다. 그가 보고 싶은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을 때. 밤늦은 시간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몹시 궁금해질 때... 태양도 내 마음과 같았던 거다. 그도 역시 내 목소리를 듣고 싶고 내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고 나와 함께라는걸 느끼고 싶은거다. 조심스럽게 받아들어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동안 그 존재감에 위대함마져 느꼈다. 본가에 들려야 한다는 태양의 말에 조금 일찍 헤어졌다. 아직 해가 완전히 기울지 않아 가로등이 켜져있지 않은 길은 조금 어두웠다. 어렴풋이 골목 어귀에서 걸어오는 아버지의 지친 어깨가 떠올랐다. 나는 그곳에서 10미터쯤 떨어진 전봇대 아래에 몇십분씩 바람을 맞으며 기다렸다. 그리움만 남은 부자의 정은 자꾸만 불쑥불쑥 그 존재를 들이민다. 함께 했던 골목은 어쩔 수 없이 나에게 측은하고 서글픈 감정만을 안겨주었다. 차가운 바람에 조금 흘러나오려던 콧물을 멋쩍게 들어 마시며 한번 웃어보았다. 괜한 청승에 혼자 민망해지는 모양이라니.. 여러군데 금이 나 있는 돌계단을 조심스레 밟아가며 바로 앞에 보이는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원아” “어!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그래. 오랜만에 보지?”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한 동네에 살았다는 앞집 아주머니께서 때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오셨다. 손에 들고 계신걸 보니 또 밑반찬을 주시려나보다. “이거 받아. 추운데 집에 보일러는 잘 돌아가?” “그럼요. 이렇게 신경써주시는데 안 돌아가면 보일러로써 자격을 상실한거죠” 웃으면서 건네주시는 찬통을 받아들고 인사를 하려는데 조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주셨다. “남의 물건을 열어볼 수 없어서... 계속 울리더라구. 오후 4시쯤 택배로 온거야” “네?” 택배발송이라는 아주머니의 말대로 받아든 상자의 윗면에 발송정보가 붙어있었다. 아무래도 안에 들어있는 물건은 핸드폰 같았다. “얼마나 울려대는지 우리 민아가 계속 뜯어보자는 통에 말린다고 혼났지 뭐야..” “하하. 죄송해요. 민아는 공부 잘 하고 있어요?” “공부는 무슨.. 요즘은 가수한다고 떠들어대는 통에 정신이 없어. 영원이가 나중에 충고 좀 해줘. 내 딸이지만 연예인 할 인물은 아니잖아” “민아 노래 잘해요.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죠. 하지만 진로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생각하라고 말해둘께요. 이거 잘 먹겠습니다” “그래. 안바쁘면 우리집에도 놀러오고 그래. 민아가 영원이 보고 싶어하더라” “아유...공주님께서 송구스럽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은 거지만 내 이웃의 존재가 갑자기 커다랗게 느껴졌다. 아주머니는 말은 안하셨지만 섭섭하셨을꺼다. 예전엔 지금 중3이 된 민아와 같이 어울리고 놀아줬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통 왕래가 없었으니 말이다. 경황이 없다고 하기엔...솔직히 아픔의 크기는 줄어들었고 시간은 많이 흘렀다. 그런 나에게 토라지기라도 했는지 저번엔 마주치고도 고개를 홱 돌리던 민아가 생각나자 괜히 웃음이 났다. ‘또로로로로’ 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나자 나는 퍼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까전에 버스에서 내린 뒤 태양과 통화를 했기 때문에 무슨 일인가 싶어 액정을 봤는데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다른 손에 쥐어진 상자 안에서 나는 것임을 깨닫고 서둘러 뜯어보았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디자인이 세련된(몸매가 잘 빠진) 핸드폰 액정에 뜬 번호와 이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곱 번인가...벨 소리가 끊기자 화면에 나타난 글씨는 ‘부재중 24통’ 아주머니의 인내력에 경의를 표하며 녀석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다짜고짜 이렇게 전화만 해대는 무대포 같은 정신은 결코 사양하고 싶었다.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럽게 두개의 핸드폰을 바닥에 놓았다. 어찌보면 이상한 우연이었다. 같은 날 다른 두 사람에게 같은 선물을 받았다.(하나는 선물이라고 해야할지 의심스러웠지만) 물론 선물이란건 좋은거지만 그것도 선물 나름이다. 통화를 할 수 있는 이 편리한 도구는 어찌보면 족쇄와 같은 의미이기도하다. 갑자기 내가 태양에게 족쇄가 차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모습이 연상되자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태양이 아니라 준이라면..... 경을 칠 노릇이다. 이미 바이바이를 던지고 작별을 고했는데 이런 것을 보내는 저의가 도대체 무어란 말이냐.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던 나는 다시 한번 울리는 벨 소리에 깜짝 놀라며 조금 우스운 내 행동에 한심함을 느꼈다. 불을 밝히며 나 받아달라 외치는 핸드폰에서는 악몽같은 글자가 다시 떠올랐다. 성도 없었고 어떤 수식어도 없이 그냥 ‘준’이었다. 그 한 글자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란.. 마치 가위에 눌리는 느낌이었다. 아마 저 부재중 통화의 숫자가 올라가는 만큼 내 인생이 고달퍼지리라는 생각에 나는 과감하게 폴더를 열고 전화를 받았다. “............” “............” “누구야” 아무말 않고 있으려니 다른 사람이 받은 줄 알았나보다. 깔린 목소리에 위축되어 왠지 말을 꺼내기가 두려웠다. “.........나야...” “너 죽을래?” “...........”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내가 지금 깁스한 손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다 부셔버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이걸 얼마나 눌러댔는 줄 아냐?” “.........여러번...했네..” “............내 핸드폰 열 식기전에 당장 달려와” “못 가” “.........못 오신다...” “............” “그럼 할 수 없지.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내가 가는 수 밖에. 꼼짝 말고 기다려라” “........준아. 그러지마” “그럼 와” “..........” “씨팔... 넌 정도 없냐? 어떻게 살을 섞은 인간이 입원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코 빼기도 안비춰? 나 여기서 미쳐 날뛰는 꼴 보고 싶냐?” 내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는 인간이 아니다. 정말 병원을 뒤집고 이곳까지 쳐들어오고도 남을 인간이다. 그 동안 병원 근처까지 또는 병실 근처까지 갔다가도 차마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시 돌아온 적이 몇 번 있었다. 녀석의 말처럼 살을 섞었다는건 쉽게 끊을 수 없는 어떤 유대감을 만들었다. 당연히 걱정이 되고 상태가 어떤지 치료는 잘 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마주하게 되면 또... “올 거야 말 거야” “...........” “애간장 녹이려고 작정했냐. 내과에도 신세지기전에 빨리 와라..” “........갈게” 아아.... 이게 아닌데. 결국은 거절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준은 무슨 생각을 하는걸까. 만약에라도 진짜 원하는게 나의 마음을 돌리는거라면......그건 안될 일이다. 어찌 일편단심 수년의 세월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남자가 지조가 있지!! 혼자 여러 가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어느새 병원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일단 근처 벤치에 앉아서 또 다시 고민했다. 지금 내 주머니에는 두개의 핸드폰이 들어있다. 왼쪽엔 태양이가 준 것 오른쪽에는 준이 보낸 것. 오른손이 닿는 것을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선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상황만 악화될 뿐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성록의 말이었다. 준은 잡히지 않는 것에 더 집착한다고 했다. 내가 무작정 안된다고만 한다면 곧이곧대로 들을 준이 아니다. 녀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르겠다. 눈에 안보이는 곳이니 이런저런 대책이나 세우지 막상 눈앞에 준이 있다면 머리가 제대로 회전이나 할까........정말 미치겠다. 병원 앞에서 30분을 배회하다 병실 앞에서 10분째 고민 중이다. 마음속으로는 수십 번 집에 돌아가고 남았다. 내 생전 이런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어찌 하늘은 단순한 나에게 이런 고난과 역경을 내리는 건지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렇게 고민만하다가 날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고 해서 나는 조심스럽게 병실 손잡이를 돌렸다. 조금 열린 틈으로 보니 반쯤 보이는 침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긴장을 늦추고 살짝 들어가니 좋은 향기가 나는 병실 안에는 있어야 할 환자가 보이지 않았다. “왁!!!!!!!” “으악!! ‘쿵’ 정말이지 너무 놀라버려서 소리를 지르고 피한다는게 옆의 선반을 받아버리고 아픔과 충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바로 문 뒤에 있다가 나를 놀래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준의 모습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버렸다. 녀석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거의 주저앉으려는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오늘 죽었어...” “준아! 잠깐!!” 준은 오른쪽 팔과 왼쪽 다리에 각각 깁스를 하고 왼쪽 팔에 목발을 짚고 서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저 살벌한 말과 함께 들고 있던 목발로 내려치려는 중이었다. 나는 곧이어 일어날 살벌한 풍경에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쳤다. 저 매서운 폭력을 어디 한두번 당해봤어야 말이다. 얼른 그의 행동을 막고 무언가 원통하다는 기를 힘껏 발산하는 그를 진정시켰다. 겨우겨우 달래어 침대에 앉히고 옆에 있는 의자를 당겨 눈치를 보며 슬쩍 앉았다. 이전에 봤을 때보다 머리가 약간 길어 앞머리가 귀찮았는지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시원하게 넘긴 이마가 가지런하고 반들반들해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곧 눈이 마주치고 나는 풀이 죽은 모습이 되었다. 그의 눈은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 “저기...너 내가 언제 올 줄 알고 문 앞에 서있었던 거야. 일부러 놀래켜주지 않아도 되는데..” “10분동안 잘 참았지. 이 불.편.한. 몸으로. 아주 문 앞에서 미기적대는거 짜증나서 죽는 줄 알았다” “??” “여기서 너 밑에 도착한거 다 보고 있었어. 혼자 안절부절 쇼를 하더구만” 병원 앞에서 30분 병실 앞에서 10분. 준의 기준에서 그 40분은 아마 지금까지의 인생을 통털어 가장 인내의 고통이 큰 순간이었을 것이다. 말을 험하게하고 신경질 적으로 행동했지만 내 반응을 신경쓰는게 눈에 보였다. 그러니 내가 더 미치겠다는거다. 그런 녀석의 모습이 귀여워 보이려고하니 진짜 미치겠다는거다. “그래. 그 동안 얼마나 바쁘셨길래 인간의 도리를 저버렸는지 들어볼까” “인간의 도리가 거기서 왜 나와. 그리고 지금 여기 왔잖아” “꼭 지 발로 찾아온것처럼 말하네. 내가 가만히 있으면 평생 안면몰수하려고 했던거 아니야?” “...........” “이......나쁜 새끼....너 그딴 식으로 하면 내가 ‘오냐 니 바라는데로 조용히 죽어지내마’ 할 줄 알았어? 봐서 알겠지만 착각은 하지마. 날 피하고 있다고 생각되면 바로 응징에 들어갈 줄 알아” “준아......” “피곤하다 이거냐?” “너 좋은 놈이야. 우리 예전으로 돌아가자. 나 너랑 등 돌리고 지내고 싶지 않아”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데. 내 기억엔 눈만 마주쳐도 기분이 나빴던 것 같은데” “친구로써가 아니라면 널 만날 이유가 없어” “싫어” “...........” “내가 미쳤다고 이제와서 너랑 친구를 해? 그게 가능하다면 비정상이지. 넌 가능한가보지?” “태양이는 상관없어?” “상관있지” “니가 이러면 모두가 괴로워” “.........내가 이러지 않으면 나 혼자 괴로운거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분한 사랑이다. 아무래도 굶주린 애정에 단비를 뿌려달라는 나의 바램이 신의 착오로 소나기가 되어 내리는게 분명하다. 어디부터 되짚어야 될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혼자 해답을 찾아내기엔 너무나 어려운 과제를 던져준 당신이다. 애꿏은 누군가를 원망하며 손톱을 깨물었다. “야.......” “??” “왔으면 병수발 들어야 될거 아냐. 사람 열쳐받게하고 나 몰라라 하면 어쩌라고..” “그런데 왜 아무도 없는거야. 나 오기 전에도 이랬어?” “무슨 말씀을... 서로 병수발 들겠다고 난리들도 아니지. 니가 뭘 모르는구나” “..........난리치기 전에 순번이라도 정해주지 그랬어. 나는 신경 안써도 되는데” “자꾸 신경건드리지 마라. 수건 좀 적셔서 닦아줘” 준이 깁스한 불편한 손으로 가리킨 곳은 욕실이었다. 그리고 환자복의 상위를 위아래로 펄럭이며 마치 마님이 하인에게 명령하듯 눈으로 말했다. 네네. 분부대로 합지요. 뜨거운 물에 수건을 적시고 약간 열기를 식힌 뒤 들고 나왔다. 아예 ‘알아서 수발들어라’는 듯한 포즈로 뒤로 엎드리고는 폼을 잡았다. 행동 하나하나가 눈에 거슬렸다. 왜 이딴게 이제와서 눈에 들어오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 지금의 행동도 나름대로 이상야릇한 해석을 하게 만들었다. 머리가 이상해지고 있었다. “엎드려 절받는 꼴이군...젠장” “............” “생각할 수록 열받는데..” “흥분하지마. 카멜레온도 아니고 등 색깔이 변하냐” “마누라도 아니면서 남의 신체변화에 왠 관심?” “눈에 보이니까 말하는거다. 왜 자꾸 삐뚤어” “.......나 참... 지금 무진장 분을 삭히고 있는거 모르겠냐? 상처 안 닿게 잘해” 준의 말대로 상처를 피해가며 닦고는 싶었지만 밀도 높게 자리잡고있는 흉터들을 피하기란 쉽지 않았다. 거의 아물긴 했지만 아직 쓰라리단다. 엄살 같아 보였지만 혹여나 조금이라도 상처가 아플까봐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왠지 상처와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다. 흉터가 남는다는 건 굉장한 오점이 될 것 같았다. 그냥 냉정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옆에 서 있는 것만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은 녀석이다. 일주일 뒤에 깁스를 풀고 자유의 몸이 되니 남은 시간동안 충실하라고 충고했다. 방학을 병원에서 맞이하게 된 준은 온몸이 근질거려 돌아버리겠다는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내가 병원신세를 또 한번 지면 사람이 아니다” “병원에서도 달가워하지 않을꺼야. 행동을 어떻게 했길래 여기저기서 널 씹어대는거야” “흥. 년이고 놈이고 시도 때도 없이 작업 들어오는데 그때마다 정중히 거절할까?” “아.. 그러한 연유로 피곤해서 병원 떠나가게 욕지거리를 했나보구나..” “누가 그래? 쓸데없는 말 주워듣고 떠벌리지 마. 진짜 병원 시끄럽게 해볼까?” “아서라. 하더라도 나 간 다음에 하던지. 이거 놓고 간다” 준에게 받은 핸드폰을 침대위에 올려놓자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해간다. 저 살벌한 표정이란. 까딱하면 녀석과 함께 나란히 옆 병실에 입원할지도 모르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녀석도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당장 넣어” “..........받을 수 없어” 팽팽한 긴장감이 곧 끊어질 것 같았다. 준과 나 사이의 보이지 않는 줄을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당기고 있었다. 여기서 밀리면 분명 판단이 흐려질 것이다. 녀석의 검은 눈동자에서 내 표정을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시간이 흐르고 먼저 시선을 피한 건 준이였다. “.......왜 받을 수 없는데”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었다. 몸에 긴장을 풀고 침대 옆에 살짝 걸터앉았다. 모성본능을 기대한거라면 적중한거다. 화를 내거나 강압적인 태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정말 이래저래 신경 쓰이는 녀석이다. “이제부터 너한테는 아무것도 받지 않을거야” “뭘 받기나 했었냐?” “............니가 주는 만큼 돌려주지 못할거야” “상관 없어. 그 딴거 바라지도 않아” “난 상관있어” “닥쳐. 딴 사람 기분 신경써가면서 행동 안해. 너한텐 충분히 배려한거다” “.......너의 이런 행동 집착으로 밖에 안보여” “집착?” “............” 준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말을 꺼내고도 아차 싶었는데 저런 반응은 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해석도 깜찍하게 하시네. 내가 집착하는거면 넌 태양일 숭배한거냐? 지난 시간동안 니가 보여준 행동들은 어떻게 받아 들여야 되지? 니가 하면 지고지순한 사랑이고 내가 하면 범죄다?” 집착이란 이름의 원수라도 가지고 있는지 갑자기 살벌한 오라가 준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핸드폰에 도청장치라도 있는 줄 알았겠네. 한영원. 아주 배가 불러서 간은 밖에 모셔놨냐? 내 감정을 그 딴 식으로 모독했다 이거지..” “그런 뜻 아니야. 좀 진정해” 당장이라도 침대에서 뛰쳐나와 한대 칠 기세를 보이는 준에게 서둘러 부연 설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중간에서 얼마나 곤란한지 알잖아. 셋이서 얼굴 맞대는걸 생각만 해도 피가 마른단 말야. 서로 안 볼 사람들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삼자대면에 피터질 상황이라면 굳이 피할 이유가 없지. 오히려 그게 더 편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니가 가볍게 생각하는 내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줄 수 있을테니까.. 지난번엔 반칙을 했기 때문에 맞아준 거지만 그날 일은 그걸로 끝이야. 나도 더 이상 호락호락 할 생각 없어” 말귀 못 알아듣는 개도 이것보다는 말이 잘 통할꺼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어야 한다는 가훈이라도 있는지 준의 눈에서는 이상한 광채가 떠올랐다. 더 이상의 설득은 체력낭비다. “왜? 감동 먹었냐? 그러니까 형님 말씀대로 귀하신 물건 잘 간직하고 있다가 호출하면 재깍재깍 반응하란 말이야” 어련하시겠어. 주머니를 뒤져 태양에게 받은 핸드폰을 꺼냈다. 준은 이건 또 뭐냐는 눈으로 힐끔 바라 본 뒤 나를 주시했다. 보면 알잖아. 삐까번쩍한 핸드폰. “먼저 선수를 친 인간이 있었군” “그러니까 두개는 필요 없다는거야” “그럼 먼저 받은걸 버려” 누구한테 받은 건지 뻔히 알면서 저런다. 꺼내든 핸드폰을 조심스럽게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든든하다는 듯 두어번쯤 탁탁 쳐준 뒤 흐뭇한 표정을 짓자 녀석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주 매를 벌어라..” “..........너 기억나?” “..........” “나 죽사발 만들고 방치해서 살인방조죄로 쇠고랑 찰 뻔 한거.... 그리고 한번은 잘 걸어가다 뒷모습이 마음에 안든다며 발로 차서 차에 치일 뻔 한적도 있지? 덤프트럭.. 아! 유치한 거짓말로 엄동설한에 3시간 동안 떨게 한 것도 아주 생.생.히 기억나네” “.........기억안나” “저런...너 머리부터 검사 해봐라. 아무래도 외견상 안보이는 충격이 있었던 듯 싶다” “.......뭐야 씨발..” “좋아! 다 용서해 줄께. 내가 뭐 목숨 몇 번 잃을 뻔 했다고 쪼잔하게 널 멀리하겠냐. 드넓은 가슴을 가진 나 한영원이 죄를 모두 씻어줄테니 너도 양보해라” “웃기고 있네” “이 자식이 정말...” 대화란 서로 들어주고 이해해야하는거지 벽에다 떠드는게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벽한테 열심히 구구절절 부연설명까지 보태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었던 거다. 인격적이며 드높은 정신세계를 자랑하는 나도 이쯤 되면 화가난다. “너 지금 환자한테 주먹 들었냐?” “이쁘게 봐줄랬더니 니 방정맞은 입이 허락을 안하네” “하?” 물론 준이 몸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면 천부당만부당한 발언을 아주 여유롭게 하고있다. 후환이 쬐금 두렵기는 했지만 난 지금 나름대로 화가 나 있는 상태다. “영원아. 일주일이다...” “..........그럼 일주일 뒤에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 재빨리 침대에서 멀어지며 작별을 고했다. 때를 알고 사라져주는게 신상에 좋지..암.. ‘쾅’ 젠장........... 문을 열기 전 바로 옆에서 박살나는 물체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저 괴력... 정말 감당이 안된다. 밑을 슬쩍보니 반토막이 난 핸드폰이 보였다. 아까워라... 거칠어지려는 숨소리를 가다듬고 뒤를 돌아보았다. 표정하며 야차가 따로 없다. 정말 다혈질에 성질도 더럽고 제멋대로인 녀석이다. “이번엔 뇌진탕으로 보내주실려고?” “그럴 작정이었으면 빗맞게 안던졌지” “.........하아......” 나오는건 한숨 뿐 내가 무슨 말을 하리오. 조각난 핸드폰을 주어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정말 문손잡이를 돌리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어!” “아.......안녕” 그래 너 잘왔다. 나랑 터치 좀 하자. 저 녀석 좀 진정시키라구. 굿 타이밍 성록과 마주치고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어색한 인사를 했다. 성록은 나를 넘어 준이 녀석을 슬쩍 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너도 싫겠지. 하지만 넌 나보다 힘도 세고 무엇보다 저녀석 친구잖냐. 감수해라. 부디 몸 조심 하렴. “가려고?” “응” “한영원!! 이리 안와?” “..........저 녀석 왜 저래. 눈에 쌍심지를 켜고 널 부르는데” “아. 설명하자면 피곤해. 당사자한테 들어” 성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무시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내가 오죽하면 겁도 없이 준이 녀석을 건드렸겠냐 말이다. 일주일 후? 흥이다. 뒤로한 병실에서 걸죽한 욕설이 한바탕 쏟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 졌다. 그래. 이 병원에서 너보다 욕 잘하고 화려한 퍼포먼스를 겸비한 사람은 없으니까 그만 광고해라. 당연히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왠만하면 ‘나는 잠깐 병실을 잘못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을 뿐 저 안에 있는 호랑말코 같은 녀석하고는 전혀.. 네버.. 상관이 없다’고 외쳐주고 싶었으나 그냥 이 병원에 다시는 발을 들이지 말자는 결정을 내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밖을 향했다. 조금 걷고 싶어서 두 정거장 정도는 버스를 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태양에게 전화를 했다. 나는 어쩌면 굉장히 이기적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기적이다. 받아주지 못하면서 희망을 갖게 하는 건 상대방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다. 그 고통을 묵인하고 그들이 내가 원하는 선에서만 머물러 주기를 원하는 나는 분명 이기적이다. “응...어디야?” “..........태양아” “그래” “뭐 했어?” “방금 저녁 먹었어. 너는?” “.........나도 먹었어” “목소리가 왜 그래” “응? 아냐....” “..........갈까?” “지금?” “그래” “하하......아니야.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 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빨리 집에 들어가” “..........응” “집에가서 전화해라” “......그래..” 그가 말처럼 한달음에 달려와줬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꼭 안아줬으면 좋겠다. Part 13. Venus “장승처럼 왜 그러고 서있는건데?” “쪽팔려서 나갈까 말까 고민 중이다” “씹......내가 쪽팔린다 이거냐?” “내 생활의 일부가 니 방종으로 물들었다는게 비통할 뿐이다.” “그렇게 쪽팔리면 나가 새끼야.” “.........준아......퇴원 날짜를 늦추고 싶지 않으면 말 곱게 써라” 또 명령조다. 항상 그랬다. 형보다 저 녀석의 말이 더 위력 있고 협박을 해도 건성으로 하는 법이 없다. 병문안 온 인간이 양손은 매번 가볍게 해서 오고 위로라는 한 마디는 먼나라 이야기이며 내 꼴이 마음에 안드는지 인상은 구길대로 구기고 서있다. “너 오지마 임마. 짜증나” “진심이냐?” “그래” “난 니가 팔 다리 제대로 못쓰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싶어서 왔지. 알다시피 니 평소 인간관계가 이런데서 드러나잖냐.. 저번에도 드럽게 뒹굴고 있는 너를 정성스럽게 씻겨준 사람이 누구지?” 우리 가족은 내가 병원에 입원하면 코빼기도 안 비춘다. 상태가 어떤지만 확인하고 일주일에 한두번 확인 전화만 올 뿐 결코 병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아마 내가 중환자실에서 숨을 헐떡이며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나 한 번 들여다볼까.. 병원에만 오면 진정 내가 주워온 자식은 아닐까 고민하곤 한다. 그럴때면 성록이 녀석이 염장을 지르지.. ‘니가 그 지랄발광만 안 떨면 위문 오는 사람이 최소한 다섯명은 넘지 않겠어?’ 하루 이상 병원에 있으면 여기저기서 지들 술안주 마냥 입에 걸치는 것들을 보고 언성을 조금 높혔기로서니 미친놈 발광이란 표현을 쓰는 저 놈의 지적수준에 얼굴로 열이 쏠렸다. 더군다나 간호사 의사 할 것 없이 나이를 거꾸로 처먹은 것들이 하라는 진찰은 제대로 안하고 몸을 더듬거나 추파를 던지는데...그럼 내가 병신처럼 당하고 있을까? “씻기기는 개뿔... 너 때문에 살갗 다 벗겨지는 줄 알았다. 감정 실어서 치사하게 복수하는거 모를 줄 알아? 내가 너한테 씻겨달라느니 그냥 쉰 냄새 풍기면서 뒹굴란다” “내 정성을 그 따위로 표현하면 섭하지. 왜 이렇게 학습능력이 딸리는 거야. 나랑 같은 유치원 졸업 안했어? 우리 그때 앨범 보면서 과거를 곱씹어 볼까?” “저리가” “.......환자복을 누가 이렇게 입으래. 단추 똑바로 안 잠궈?” “더워서 그런다 씨발. 삼복 더위에 단추 좀 풀렀는데 왜 잔소리야!” 성록은 교복이든 사복이든 잠옷이든 단정하게 입지 않는 걸 제일 싫어한다. 물론 욕하는 것도 싫어하고 큰 소리도 싫어하며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싫어한다. 그러면서 유독 내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거슬리는 건 못 참는다. 사사건건 간섭하고 염장을 지른다. 이게 과연 죽마고우인지 철천지원수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요즘은 가뜩이나 얼굴만 보면 서로(거의 내가 먼저지만) 으르렁대는데 왜 굳이 오지 말라는 병문안을 와서 사람을 들볶는지 모르겠다. “더워? 에어컨 잘 나오고 선풍기까지 있는 특실이 덥다고? 저 밑에 6인실 한번 견학하고 올까?” “............” “따.뜻.한 목도리 둘러주기 전에 똑바로 잠궈” 내가 지금 몸만 멀쩡해도 저 얄미운 입을 한대 패줬을 텐데... “왜? 주먹이 근질근질한 표정인데? 어디 한번 휘둘러봐. 톡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씨......ㅂ” 올라오려는 손을 보고 뒤의 말을 얼른 삼켰다. 침묵하자. 내가 언제 이 녀석하고 싸워서 이득을 본적이 있던가. 더군다나 이 상태에서 대들다간 나만 손해다. 너도 일주일 뒤에 보자..으득... “영원이한테 왜 그러는데” “...........상관마” “.......거기까지 해” “.........” “넌 충분히 전진했어. 이제 그만 가” “..............뭐가 충분한데? 나랑 그 자식이 한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겨우 섹스 한번 한거? 그래. 난 밤마다 떠오르고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리고 목소리가 듣고 싶어 미치겠다. 누군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그리워하는데 그 자식은 지 남편 생각에 내 생각인들 조금이라도 하겠어? 아주 행복에 겨워서 몸둘바를 모르고 계시겠지. 병문안은커녕 전화한통도 없는거봐. 제발 전화 좀 해달라고 갖다 바쳐도 버리는 새끼야. 젠장 열 받아...” “.....열 받지?” “..........” “덥지?” “......닥쳐. 왜 실실쪼개고 난리야” “그러니까 남의 떡 그만 넘봐” “..........그러는 너는? 너도 찔러봤잖아 못 먹는 감” “찔러봤지. 근데 너무 물컹해서 버렸어. 알잖아. 나 홍시 싫어하는거” 흥. 너무 단단해서 안들어갔겠지. 니 놈 속을 내가 모를 줄 아냐? “지금 속으로 나 비꼬지?” “돗자리 깔아라” “........준아” “..........” “너 사탕 먹고 싶다고 엄마한테 조를 때 내가 대신 사줬지?” “...........” “비오는 날 놀이공원 가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칠 때 내가 데리고 가줬지?” “......생색내냐?” “오토바이 위험하다고 집에서 안사주는거 내꺼 빌려 타면서 배웠지?” “야......할 말 있으면 돌리지 말고 말해” “근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겠는데... 태양이가 가지고 있는 건 뺏어줄 수 없어” “...........” 녀석이 참 생소했다. 10년을 넘게 봐온 얼굴인데도 다른 사람 같았다. 구박하면서도 일일이 챙겨주는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 넌 내가 부탁하는 일이면 귀찮아하면서도 다 들어줬지. 내가 모를 리 있냐. 근데 영원이를 뺏어달라는 부탁 같은건 한적 없어. 너한테 그런 파렴치한 부탁 한적 없어. "그러니까 포기해“ 성록이 가끔 나에게 떠들어 대던 말이 있었다. ‘중심 똑바로 잡아. 넘어지기 전에’ 핸들을 한손으로 잡으면 기울고 눈을 한쪽만 뜨고 있으면 중심을 잡기 힘들다. 싱거운 원리를 장황하게 설명하더니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며 쿡쿡 찔렀다. 너나 똑바로 하라며 뒤통수를 때리면 그때부터 투닥투닥... 녀석이 내뱉은 말의 결론은 항상 주먹다짐으로 끝났다. 분명히 걸쭉한 욕과 함께 녀석의 쭉 빠진 바디에 발길질을 들이댈 차례였지만 몸도 성치 않고 무엇보다 한숨을 내 뱉듯 말을 마친 녀석에게 전투력이 사라져버렸다. 오늘따라 전혀 너 답지 않다는 무언의 말을 담아 노려봐주었더니 이상하게도 그윽한 눈빛을 하고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새삼스럽게 이 미모에 반했나... “부담스럽다..” “........뭐가?” “니 눈깔이. 아까 먹은 밥 다 올라오려고 한다” “그러셔?” “이제 어두워지는데 그만 퇴장해줬으면 좋겠다” “어제 태양이 왔었다며?” “..........” “어디 더 망가진줄 알았더니 멀쩡하네” “.....그 새끼가 나한테 뭐랬는줄 아냐? 발밑에서 미기적 거리다 밟히지 말고 퇴원 할 때 까지 몸조리 잘 하란다. 그것도 재수없이 안.면.가.득 웃음을 띄우고..” “........이런..그 녀석.............바른말 했군” “쓰레기통에 처박힌 저거 보이냐? 하얀 국화를 선물이랍시고 가지고 왔단다. 그러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래. 미친놈” “그러게 왜 너 이뻐하는 녀석 속을 뒤집어 놔” “일부러 그랬어? 그 새끼가 자초한 일이잖아. 처음부터 영원이한테 그딴 식으로 안했으면 나도 손 안댔어” “퍽이나..” “..........가라 임마” 살벌하게 말했건만 눈 하나 깜짝 안한다. 반항를 하는건지 취조를 하려는건지 분간하기 힘든 눈빛으로 가만히 처다보더니 히죽 웃음을 흘린다. 이게 진짜 미친게 아닌가 싶어 실눈을 뜨고 노려보았더니 곧 웃음을 거두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저 표정.. 가끔씩 보이는 이질적인 모습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너 4년동안 누굴 진지하게 쫒아다닐 수 있어?” “.........” “냉대하고 무시하는 상대를 꾸준히 좋아할 수 있어?” “아니” “참을 인자 셋을 합하면 뭐가 되는줄 알아?” “몰라” “............” “그딴걸 왜 묻는데? 누구랑 비교된다 이거냐?” “아니. 애초부터 비교 대상이 안되지. 넌 이미 졌거든” 따가운 살기에 눈을 떴을 때 태양이 마치 저승사자처럼 내 앞에 버티고 서있었다. 녀석의 눈을 보면서 비로소 난 ‘후회’라는걸 하게 되었다. “나가자” 홈그라운드라는 든든한 빽이 있는데 내가 왜 나가냐. 거기다 지금 니 상태가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몸을 대충 일으키고 움직일 생각을 않자 녀석이 조금 더 다가왔다. 확실히 상태가 안좋아 보였다. “끌려 나갈래? 사랑하는 씹새끼야” “...........” “옷 입어. 왠만하면 두꺼운걸로” “더워” “더운게 나을꺼란걸 굳이 말로 설명해 줘야하나?”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존재하는 놀이터는 썰렁 그 자체였다. 온몸에 오한이 들어 소름끼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적... 오로지 정적만이 우리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었다. 화가 나겠지. 날 죽이고 싶겠지. 물론 예상했던 일이다. 녀석을 기만함으로써 돌아올 대가는 충분히 각오한 일이다. “그래...즐거웠어?” “..........” “감상을 한번 말해봐. 무척 궁금하거든” “.....뭐...그냥...” “둘이 그렇게 죽이 잘 맞는 줄은 몰랐는걸. 깜찍하게도 숨겨놓은 니 명의의 별장이 있다는건 생각도 못했지. 공기좋고 물좋은데 가니까 한영원이 정신을 못차리든?” “잠깐! 어짜피 영원이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든건 나니까 책임은 나한테 물어. 이것만 확실히 하고 패면돼. 모두 내 의지대로 한거니까 너한테 변명할 여지도 없어. 아무튼 난.... 후회안해” 거짓말이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금기를 깬건 나인데 왜 후회가 없겠는가. 똑바로 주시한 태양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복부에 끔찍한 충격을 느끼고 뒤로 넘어졌다. 제길... 니 발차기가 보통 발차긴줄 아냐. 녀석의 하체를 사용한 공격은 거의 살인 무기 수준이다. 잠시 숨을 제대로 내쉬기 위해 몸을 구부리고 있으려니 태양이 눈높이를 맞춰 내 앞에 앉았다. 손을 들어 흐트러진 내 머리를 넘겨주는데 너무 다정해서 방금 전 나를 찬 녀석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찡그러진 미간이 불편한 심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차라리 냉정한 얼굴로 정신 못차릴때까지 패줬으면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질 것 같았다. “그래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쿨럭....” “날 떠날 수 없어” “...........” “절대로” 확신의 말. 자신감이 넘치는 단정. 그런데 왜 그렇게 불안해 하는거지? 영원이 너에게 줬던 모든 신뢰를 한순간에 깨버린 것 같아 불안해? 한번 맛본 유혹적인 덫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할까봐 두려워? 너도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하긴. 이제야 마음 똑바로 잡고 그동안 헌신해온 불쌍한 중생에게 자비를 배풀려고 마음먹었더니 어느덧 마음은 콩밭에 가있는데 흔들리지 않을 수 있나. 차라리 우리 둘이 다정했던 그때가 나았지? 안그래? “컥! 헉.....으....” 피하지 않고 고스란히 떨어지는 린치를 견디다 한계를 느끼고 주저앉았다. 가슴을 붙잡고 숨을 고르고 있자 녀석도 더 이상 할 생각이 없는건지 담배를 태우며 조금 떨어져 앉았다.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힘이 떨어지는 펀치는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이래뵈도 참된 스파르타 가정교육의 결실로 맷집이 꽤나 쎈 편에 속해 녀석도 내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맘 약해서 어디 제대로 지켜내겠냐. 나여서....... 그래서겠지... “미안하다” “..........” “씨발...미안하다고..” “........미안할 짓을 왜 해” “모르냐? 내 성격” “아니까 살려뒀지..” “......죽일 것처럼 패놓고.... 씨...” “...........” “.........아.....아파라...” “.....일어나” 밉지? 내가 이러면 더 패고 싶지않냐? 나한테 살가운거 반만 영원이한테 해봐라. 껌뻑 죽어나지.. 왜 이렇게 꼬이냐. 짜증난다...안 그래? “너 앞으로도 영원이 막 대해라” “..........” “내가 눈물나게 잘해줄란다. 그럼 나한테 넘어올걸” “......당분간 근신해라. 화 안 풀렸다” 태양의 목소리가 등을 타고 기분 좋게 울렸다. 저도 꽤나 힘을 썼을 텐데 잘도 들쳐 업는다. 녀석이 한영원을 원하는 만큼 내 마음의 크기도 그만큼인지 또는 그보다 큰지 잘 모르겠다. 한영원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라는거 밖에는 아는게 없다. 괴롭고 아팠던 추억을 싸그리 그의 머릿속에서 지우고 싶다. 그래서 나라는 녀석이 영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게.. 더럽게 철없던 시절 멋모르고 한 행동들이 잊혀질 수 있게... 딱 그렇게만 됐으면 좋겠다. 아르바이트. 녀석이 참 신기하다. 구질구질하게 생활력이 강하다는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이 더운날 주차장에서 땀을 흘리고 참된 노동의 대가로 몇푼 쥐어지는 돈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는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지금 더워 미치시겠다. 차에서 나오는 역겹고 뜨거운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당장 녀석을 보쌈하고픈 싶은 심정이 들었다. 빵빵!! 이런!!! 어떤 쌥쌔가... 도저히 더위를 견딜 수 없어 영원이 눈에 띄는 곳으로 돌아 마트안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실상은 차들이 우회하는곳을 가로질러) 겁도없이 까만차 한대가 앞에서 경적 울려댔다. 피곤과 짜증과 불쾌함의 수치가 오늘 하루 최고치를 넘나드는 가운데 이성을 상실한 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좌석에 있는 운전자를 끌어내렸다. 꺼내놓고 나니 머리는 노란색으로 염색을 하고 옆에는 껌이나 쫙쫙 씹어대는 계집애랑 ‘나 날라리요’라고 말 안해도 비디오인 인상착의하며 여러 가지 지금의 조건은 나의 분노게이지를 점점 상승시키고 있었다. 이런 같잖은 것들과 상대하느니 집에가서 잠이나 자자는 나의 신조는 오늘 기분이 허락하지 않았다. 너 오늘 잘 걸렸다. “다시 한번 시끄럽게 해봐. 내 기분이 엿같아 지는 것 만큼 니 수명이 짧아질꺼다 이 새끼야..” “씨..씨팔! 뭐야! 이거 아..안놔!” 잡고 있는 멱살을 풀려고 아둥바둥 대는 꼴이 볼만하다. 오늘 받은 스트레스는 니가 좀 가지고 가야겠다. “뭐? 씨 뭐? 잘 안들리는데? 더 크게 말해봐. 사내새끼가 목소리가 그것밖에 안돼?” “깍! 이봐요. 사람 죽겠! 어머! 미쳤나봐!!” “컥! 우욱..” 뒤에서 꺽어누르고 목을 더 세게 쥐어잡자 깔린놈 뿐만 아니라 아까부터 옆에서 소리지르던 여자의 안색도 하얗게 질려나갔다. “준아! 그 손 놔” 살기... 오랜만에 느껴보는 짜릿한 감각에 도가 지나쳤나보다. 당황한 영원의 모습이 옆에 보였다. 그래. 여긴 이 녀석 일터였지. 손을 놓자마자 미친 듯이 기침을 토해내는 놈을 슬쩍보고 주위를 둘러보니 지켜보는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굳어버린 영원의 인상이 사태의 심각성을 말해주었다. “꺼져” 그러게 왜 지금 바로 여기서 나한테 걸리냐. 한동안 목주위에 빨간 멍을 달고 다닐 녀석이 혼비백산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너 정말.....” “........멀었냐?” “너 저기 로비에 의자 보이지? 30분 동안 얌전히 앉아있어” “뭐? 10분이나 기다렸는데 30분을 더 기다리라고?” “그래...내가 하고싶은 말이 바로 그거다. 겨우 10분 죽치고 앉아놓고는 지 승질난다고 사람을 반 죽여놔? 너 도대체 상식이 있는 인간이야?” “........30분. 1초라도 늦으면 너 그냥 끌고 나간다” 황당해하는 영원에게 씩 한번 웃어주고는 녀석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키킨 의자로 걸어갔다. 여기서 저 녀석 화를 돋구어봤자 미움만 더 사겠지. 털썩 주저앉아 주차장 쪽을 보니 아직 안심이 안되는지 힐끔힐끔 이쪽을 주시하는 녀석이 보였다. 손을 흔들어주고 아무것도 안한다는 제스츄어로 어깨를 한번 들썩여주니 그제서야 고개를 완전히 돌린다. 한 여름의 더위는 그날을 생각나게 했다. 무척이나 더워 사물이 온통 흐리게 보였던 그날. 열대야를 못 견뎌 밖으로 나와 식어버린 바람을 맞으며 짜증스럽던 기분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던 그때. 너는 다른 아이들의 근심어린 얼굴과 비교되게 무척이나 밝은 모습이었지. 그때의 상황과 현실에 지독하게 안 어울리는데 말이야. 당돌한 녀석의 모습이 떠오르자 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저의 태양을 모시지 못하게 될까봐 나에게 대들던 모습.. 한발 늦었던 안타까운 상황이 흐리게 떠올랐다. 늦었으니 두발 앞서 나간다고 생각했지만 제자리를 맴돌 뿐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성록의 말처럼 전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거기서 멈추라고 했다. “가자” “...........” “왜?” 빤히 쳐다보고 있자 영원이 인상을 조금 찌푸렸다. 작은 표정하나도 신경 쓰이고 변화할 때마다 세포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정말 간지러운.... “3분 지각” “.........어쩌라고” “했으니까 앞으로 3일 동안 나랑 놀아줘야돼” “내가 얼마나 바쁜 몸인지 보고도 모르냐? 원래 한달간 하기로 한건데 일주일밖에 못하는 거란 말이야. 이게 다 태양이 녀석 허풍 때문이야. 자기가 좋은 아르바이트 있다고 솔깃하게 해놓고는 이리저리 끌고 다니면서 놀기만 했잖아. 아...한달이면 세달치 생활비는 걱정 없는건데..” “그러면서 어째 놀러다닐땐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이더라..” “......그렇다고 인상 구기고 다닐 수는 없잖아. 알면서..내 쿨한성격” “......멍청하기는” 노려보는 영원의 손을 붙잡고 마트 안으로 들어가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자꾸 손을 빼내려는 행동을 표정하나로 제압하고 식품관으로 내려갔다. 갈증 때문에 뭐라도 마셔야할 것 같았다. “야야. 어디가? 밖으로 나가자” “목말라” “아씨...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누가? 어떤 새끼가?” “목소리 좀 낮춰!” “뭘 그렇게 신경써. 나랑 다니려면 사람들 시선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게 편해. 그러니까 자꾸 귀엽게 찡그리지 마라..” “넌 도대체 왜 하지 말라는 짓을 죽어라고 하냐. 내가 여기 오지 말라고 했지?” “까불지 말고 음료수나 사. 난 이프로” “이프로 같은 소리...어! 정희다” 뭐? 누구? 반가워마지않는 영원의 목소리에 시선을 주니 정말 최정희가 있었다. 하하. 가관이군 백승권... 할 짓이 그렇게 없냐. 여자 뒤에서 장바구니나 들고 쫓아다니는 폼이 볼만 하구나. 넌 이제 나한테 딱 걸렸어. 영원이 가서 아는체를 하자 인상을 찌푸린 승권이 주변을 획획 둘러보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회심의 미소와 함께 슬슬 걸음을 옮겼다. 저 콤비에게 당한걸 생각하면 승권이 녀석이 오늘 나에게 현장을 들킨건(?) 아마 땅을 치고 후회해야할 일이 될꺼다. 언제부턴가 검은 생머리를 고수하는 최정희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어서인지 제법 눈에 띄였다. 하긴...그 피가 어디 가겠나. 닮은꼴 형제를 사랑하는 니 마음이 그 사실을 더 확실하게 해주잖아. 안그래? “어머! 영원이네. 여긴 왠일이야?” “응. 나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잖아. 장보러 왔어?” “아~ 태양이한테 들었어. 그 주차 아르바이트 한다는데가 여기였어? 승권이 집이랑 가깝네”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부부 같다. 야” “오늘 컨셉이 마님과 머슴이잖아. 저 인상 구겨진 것 좀 봐. 꾸준히 교육시킬 필요가 있어” 저것들이 언제부터 친했다고 길 가운데서 담소를 나누는거지? 승권이 녀석에게 눈치를 주자 저도 못마땅한 듯 영원이 쪽으로 고개짓을 했다. 가던 길 계속 가라 임마. 오늘 이 현장은 내가 두고두고 생각나게 해주마. “뭐 만들려고? 고기샀네” “응. 요즘 우리 바깥양반이 몸보신을 못해서 좀 비실거리잖니. 이쁜짓좀 하려고.. 근데 저 날라리랑 왜 같이 다니니?” “어?” “야 최정희. 단어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 안들어?” “언어순화에 누구보다 앞장서야 될 너한테 그런 소리 들으니까 불쾌하다 얘” “그 예쁜 입에 자크하나 장식으로 달지 그래? 딱 어울리겠는데” “굳게 다문 니 입술보다 나을까? 심심하면 집에 가서 침묵의 007빵 놀이나 해라. 가족들이 무척이나 기특해 할꺼다” “니 바뀐 패션감각에 부모님들이 한시름 더셨겠다. 그러고 있으니까 드디어 사람처럼 보인다” “왜? 예전에 빨간 머리가 그립니? 너 좋아했잖아” “아직 사람이 덜됐구나. 야 백승권. 마늘과 쑥을 한 트럭 사가는게 좋겠다. 취향도 특이하지.. 이제 사람한테 애정을 배풀 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보기에 얜 가망이 없어 보인다” “아직도 정신세계가 그것밖에 안되니? 단군신화는 울궈먹은지 5년 됐잖아. 새로운 레파토리를 생각해 내기엔 너의 지적능력이 한참 부족하겠지만 이제 좀 지겹다” 본격적으로 해보자 이건데... “준아! 그만해” “왜?” “사람들 많은데서 뭐하는거야” “야. 너 지금 엄청나게 차별한다. 나 혼자 벽에다 떠들었냐? 잰 왜 빼는데” “어휴 사내자식이....야 빨리 나가. 정희야 나중에 보자” 영원이 먼저 입구쪽으로 몸을 돌리고 나가는걸 보고 더 이상의 체력낭비는 재미 없어졌다. 저 계집애는 자기밖에 모르지. 웃는 얼굴에 속내는 어떤 마음을 감추고 있는지 알게 뭐야. 재수없군. ‘영원이 한테서 떨어져’ 뭐? 승권이를 앞장세우고 뒤에 따라가며 얼핏 속삭인 말이 정확히 귀에 박혔다. 떨어져? 감히 나한테 그 따위 말을 지껄였다 이거지? 혈연, 지연, 어설픈 관계 싹 다 무시하고 한번 밟아줘? 내가 널 가만히 두는 이유가 오직 하나라는걸 모르나? 끓어오르는 화를 누르며 멀찌감치 떨어져 기다리고 있는 영원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멋도 모르고 설쳐댈 때 한번 손봐줄 필요가 있는 계집애였다. 아마 태양이 한번이라도 건드렸다면 그렇게 했을꺼다. 한번 품어보고 싶은데 뜻대로 안되니 미치겠지. 생각해보니 너도 편하진 않겠구나. 아...짜증나는군... “집에 안가?” “놀자” “나 일하고와서 피곤해. 잠도 오고..” “그럼 너희 집에 가자” “..........정말 집에 안가?” “태양이도 없는데 이럴 때 너랑 실컷 놀아야지” 그래. 지금부터 니말 들을 수 있는데까진 다 들어줄 테니까 오늘은 내말 좀 듣자. 나도 피곤하다. 망설이는 영원의 손을 붙잡고 골목을 올라갔다. 왠지 손목에 힘이 빠져버린 듯한 느낌에 조금 슬퍼졌다. 여러 가지 생각하기도 싫고 고민하기도 싫었다. 복잡한건 질색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대하게되면 그런 것 들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람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고 상처를 감싸주고 싶다. 지금은 사랑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충고했다. 열정을 쏟아 부으면 넘쳐흐르고 간절해지면 어긋나기 마련이라고 친구란 녀석은 그렇게 단정지었다. 그래서 넌 뒤에 숨어서 사랑을 하는거냐? 유성록... 난 좀 당당해지고 싶다. 실패를 맛봐도 도전하는 정신이 중요하다는건 부딪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벽이 커서 지금은 잠시 물러나 있지만 나는 계속 도전할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은 힘없이 내가 이끄는데로 따라오는 이 손이 후에는 꽉 맞잡아서 오히려 나를 끄는 힘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 것이다. epilogue ‘무대포 상’이란건 바로 눈앞의 이 녀석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수업시간에 시도때도 없이 땡땡이를 치며 담임의 잔소리는 귓가를 간지럽히는 모기소리 쯤으로 알며 학우들의 생필품을 마치 제 것 인양 씀씀이가 헤프다 못해 넘치는 한마디로 파렴치한 녀석이란거다. 별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힘껏 노려보았다. 둔하긴 또 얼마나 둔한지 뒤에서 칼을 뽑아들고 살기를 뿌려도 뒤통수만 긁적일 녀석이었다. 방금 전 국사 시간엔 어땠는가. 다가오는 기말고사의 압박에 필기한번 정성스럽게 해보려 했건만 주제에 자신도 필기한번 해보겠다고 앞에서 깝쭉대는 통에 시선의 분산과 어지러움을 느끼며 중도포기를 해야했다. 왜 내가 의도하지 않는 녀석의 행동에 괴로움을 느껴야 하는걸까? 하나하나 못마땅한 행동만 하는 녀석이 왜 나의 우상인 반장의 관심을 모두 독차지 하는거지? 처음엔 반장의 드넓은 아량과 올곧은 성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녀석은 소년가장이었으니까. 물론 주어진 환경에 맞지 않는 해맑은 녀석의 모습과 비교해볼 때 한번쯤 의심해볼 필요성이 있는 정보였지만 생활기록부에 정확히 기재되어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본 결과 저것은 천성이구나! 라고 혼자서 납득했다. 어쨌든 잘 매치되지 않는 녀석의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글씨가 왜이래. 어라. 남진이 너.... 나보다 필기를 더 안했구나” 너보다 필기를 더 안한게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만 그건 모두 니가 앞에서 방정맞게 깝쭉대며 평소에는 안하던 필.기.를 해서이다. 라고 서술형 문장으로 조목조목 따져주고 싶었지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녀석을 말로써 면박을 준다는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몇 번의 체력소모로 깨달은 바이다. 기분이 나빠져 녀석의 손에 들려진 나의 필기노트를 획 빼앗았다. “너 또 내가 오랜만에 필기했다고 삐진거냐? 괜찮아 임마. 그래도 널 밀어내고 우리반의 암울한 등수에서 탈출할 일은 없으니까. 그럼 얼마나 동지들이 슬퍼하겠냐. 남자가 의리가 있어야지...안 그래?” 그 암울한 등수에 나를 포함시키진 말아다오. 그리고 또 라니. 저 말도 안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입을 당장에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녀석이 한번 뒤로 몸을 돌리면 다음 수업이 시작되고 선생님이 교편에 정착하는 그 순간까지 앞으로 바로 앉는 일이 드물다는건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힐끔 바라보니 뒷문으로 나가는 나를 생글거리며 쳐다보고 있었다. 욱 하는 성질이 끌어오르는걸 다시 한번 참아야 했다. “잠깐” 나도 키가 작은 편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몸이 뒤로 젖혀지는 느낌을 받으며 고개를 살짝 올리니 그 유명하신 휘준 여왕님께서 짜릿한 시선을 하사하고 계셨다. 는건 되먹지 못한 추종자들의 되먹지 못한 발상이었고 나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짜릿한 시선 때문이 아니라 매번 느끼지만 살벌한 시선 때문에. 굳어있는 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한영원 나오라 그래” 너에게도 말할 수 있는 입과 움직일 수 있는 수족이 있는데 왜 나한테 그런 떨떠름한 명령을 하는거냐. 라는 말을 머릿속에 굴리며 잠시 뱉어낼까 말까를 약 3초 동안 생각해보고 다시 교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생글거리던 녀석은 어느샌가 책상에 엎어져 잠을 청하는 듯 했다. 저 단순한 동물이 할 수 있는 건 아마 먹고 자고 사람 염장지르는 단 세 가지의 일일거다. 옆구리 위쪽을 쿡쿡 찌르자 녀석이 조금 놀라며 일어났다. 미간을 찌푸린 눈으로 나를 보더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밖에...” “...........” “너 찾는다고” “누가?” “......나가보면 알잖아” 내가 전할 말은 다 했으니 간다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고 몸을 돌리는데 팔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녀석이 심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긴장이 되었다. “남진아...” “..........” “매점 가면 나 우유하나만 사다주라.” “............” “딸기우유로” 당부하듯 말을 마친 녀석이 뒷문 쪽으로 나가는걸 보며 마음을 고쳐먹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결코 녀석의 딸기우유 따위로 매점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며. 다음시간이 수학인가. “남진아. 이거” “어. 애들 나눠주면 돼?” “3,4분단” 나에게 출력물을 주던 문우가 갑자기 손을 멈추길래 시선을 따라가 보았더니 뒷문으로 보이는 위치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녀석이 있었다. 다시 문우를 보았는데 잠시 그쪽을 노려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 구겨질 정도로 세게 쥐고는 교실 앞쪽으로 걸어갔다. 문우는 심각한 표정이나 살벌한 분위기를 만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 근래 눈에 띄게 표정이 굳어있고 근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단 녀석이 옆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이고 문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녀석과 관계된 일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문우에게서 느껴지는 그 생소한 분위기가 싫고 어색한 공간에 갇혀있는 듯한 느낌이 싫었다. 문우만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편안한 분위기가 그리웠다. 지금은 무언가 단단히 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문우의 말 한마디에 따라 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만 봐도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녀석이 옆에 있을 때 지어내는 웃음이 억지스러운 것도 일부러 편안하게 해주려는 고집스러운 행동도 문우답지 않았고 몹시 신경 쓰였다. 단지 같은 반의 친구로서 보는 입장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드는데 학급을 함께 이끌어나가야 하는 부반장의 위치에 있는 지금의 상황은 더욱 심리적인 불안감을 가져다주었다. 문우가 녀석에게서 찾는 것도 단지 ‘밝음’ 하나 뿐인걸까? 그거라면 나는 결코 줄 수 없겠지. 술만 마시면 딴 사람으로 돌변하는 아버지나 오래전에 생활고를 못 이기고 가출해버린 어머니를 떠올리는 건 하루일과 중 가장 불행한 일일거다. 그리고 나는 집이라는 곳에 애착을 가질 수 없었다. 그곳엔 피곤한 일상과 피하고 싶은 생활만이 있을 뿐이다. 마치 오래된 사진 전시회에서나 감흥 있게 바라다 볼 수 있는 낡아빠진 골목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도 저 밑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아직까지 걱정 없이 살 수 있겠지. 내가 찾지 못한 희망을 아이들이 찾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슴 한켠에서 느껴졌다. 모두가 불행해지는건 무척 슬픈 일이다. “어. 일찍왔네” 녀석은 너무나 인사성이 밝았다. 학교에서나 밖에서나 한결같이 녀석의 말을 무시하는 나를 굳이 이렇게 불러준다 해도 전혀 감동스럽지 않은데 말이다. “야. 너희 집에 밥 남은거 있으면 좀 주라. 내일 아침 해먹으려니까 귀찮아서” 녀석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르며 ‘없어’라고 짧게 고했다.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는 나를 조용히 쳐다보더니 쓱 지나쳐 갔다. 한영원은 내가 사는 집에서 두 채의 주택을 넘어 세 번째 갈색 지붕의 골목 어귀에 살고 있었다. 내가 이 동네에 이사온지 1년이 조금 안됐고 녀석이 이웃이란걸 안지가 6개월이 조금 안됐다. 그리고 마주칠 때 마다 녀석이 걸어오는 말을 무시한 것도 3개월이 되었다. 나는 어쩌면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녀석과 나의 환경을 비교하면서 내가 숨기고 있는 진실과 겉으로 치장하고 있는 위선이 조금씩 더럽게 느껴졌다. 녀석의 밝음도 그런줄 알았다. 억지로 감추는 어두움. 착각이었다. 한영원은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그 녀석을 원했던 거였다. 그나마 존재하던 내 자존심이 녀석 앞에만 있으면 모두 무너져버리는 것이었다. 내 위선이 녀석의 밝음 앞에서 처참하게 뭉게지는게 싫을 뿐이다. 그것이 자격지심이라고 정의내리는 내 자신도 싫었다. “야. 치사하게 이웃사촌끼리 그러지 말고 나눠먹자” 잠시 멍하니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고 있다가 흠칫 놀라서 뒤를 보니 녀석이 한 손에 찬통을 들고 서있었다. “자. 이거 우리 앞집 아주머니가 아주 맛있게 만든 잡채거든. 니가 밥을 좀 주면 나는 더 구미 당기는 이런 향응을 제공 하겠다 이 말씀이야” 찬통을 짤래짤래 흔들며 미소 짓는 얼굴을 보며 이 녀석이 도대체 왜 이러나 라는 고민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화성에서도 추방당한 듯한 괴상한 생물체의 생각을 이해 한다는건 솔직히 불가능했다. “너 나랑 친하냐?” “그럼. 우린 같은 반 친구에 이웃사촌이잖아” “같은 반은 맞는데 친구는 아니고 같은 동네 사는 건 맞는데 이웃사촌은 아니야” 내가 한 말이 조금 놀라웠는지 녀석이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틀린말 한건 아니니까 녀석도 어느 정도 이해했을 거다. 아주 구제불능의 외계인이 아니라면. 밥을 내어줄 의사가 없다는걸 분명히 하고 걸음을 옮기려 했다. 지금처럼 녀석이 웃음을 흘리지 않았다면. “크크큭...” “.........뭐가 웃기지?” “야야. 남진아. 부반장” “..........” “너 왜 그러냐. 내가 말 붙이고 괜히 친한 척 하는게 눈에 거슬리는 거야? 표정도 살벌하고..나 무섭다”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의 표정은 아니었다. 씁쓸한 얼굴이 측은한 눈빛이.... 몹시도 거슬렸다. “알면..... 좀 비켜줄래”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집에서 큰 소리 들리더라” 뭐? 귀를 의심하며 녀석을 마주보았다. 마치 우리집 가정사를 모두 아는 듯한 말투로 녀석이 말하는 같은 반 친구의 걱정처럼 이상한 소리를 지껄였다. “그래도 힘들 때 누군가 옆에 있다면 위로가 되지 않을까? 난 그랬어” “.........무슨 소리지?” “따뜻한 한마디면 정말 눈물이 쏟아져서 쪽팔릴 뻔 했지. 그래도 그게 더 나아. 마음을 닫는 것 보다는” “...........” “내가 니 이름을 열 번 부를 때 넌 내 이름을 입 밖에 한번이라도 내봤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말을 하는 내가 같잖게 보일수도 있겠다. 그런데.. 방법을 잘 모른다면 한번 쯤 손을 내밀어 볼 수는 있는거 아냐? 그것조차 못한다면 정말 바보지...” 앞에서 생글생글 웃던 녀석이 아니었다. 밝음만으로 포장한 듯한 그 자체가 빛이었던 녀석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 탁하고 어두워진 녀석의 눈에서 나는 같은 고통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녀석에게 느꼈던 모든 열등감이 순식간에 부끄러움으로 바뀌었다. 한살 많은 나이로 정신적 성숙함이 더해서인지 녀석은 곧잘 어른스러운 소리를 해댔다. 그것은 녀석과 내가 대화란 걸 하게 되었을 때부터 깨달은 것이었다. 그런데 녀석의 취향과 녀석이 사랑하는 또 하나의 괴물은 우리 둘 사이가 가까워지는 찰나를 어긋나게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녀석은 그렇게 하나의 태양만 바라보고 있어서 빛이 났던 것일까.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고작 조금 내려받는 태양빛에 녀석이 빛나 보인다고 해도 그 앞에서는 작아만 보이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빛을 받는 건 녀석이 아니라 태양이었다. 태양은 그 녀석 없이 영원할 수 없었다는 거다. 한영원이란 녀석이 조금 궁금해졌다.